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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증(金樂曾)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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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유도(有道)
생년1693(숙종 19)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김려(金礪)

[상세내용]

김낙증(金樂曾)
1693년(숙종 19)~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유도(有道)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증조부는 김재현(金載顯)이고, 조부는 김윤호(金胤豪)이다. 부친 조산대부 행희릉참봉(朝散大夫行禧陵參奉) 김려(金礪)와 모친 임세공(林世恭)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생은 김낙조(金樂祖)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시에 생원 3등 70위로 입격하였고, 1736년(영조 12) 정시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하였다. 다음 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지평으로 재직 중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관련된 상소를 올리는 일을 정지시킨 대사헌(大司憲) 송성명(宋成明)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였다. 또한 재차 사간원정언으로 제수되었고, 의리를 강구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할 것, 궁곤(宮壼)과 화합할 것, 도학을 숭상하여 선비의 기풍을 진작시킬 것, 충언과 아첨을 분별할 것, 옳고 그름을 명백히 밝혀 제왕의 정도(正道)를 세울 것, 벼슬을 신중히 내릴 것, 절약하고 검소할 것, 수령을 신중히 선택할 것, 세자를 교육하여 덕성(德性)을 기를 것, 하늘의 위엄을 두렵게 여겨 사람의 도리를 닦을 것의 10조목을 임금에게 상소하였다. 1738년(영조 14)에는 왕명으로 귀양을 간 권집(權䌖)을 용서한 것이 과실이라 간언하였다. 1739년(영조 15) 사간원정언에 재임명되었으나,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서명빈(徐命彬)을 웅천현감(熊川縣監)으로 내보낼 때 영조가 부당하게 작은 혐의로 책임을 묻는 것에 격노하여 신하들을 해임을 하였는데, 이때 정언직에서 쫓겨나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부양해야 할 여든 살의 노모가 있다는 이유로 곧 풀려나게 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