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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봉(璽封)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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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혼미(混迷)
호(號)상월(霜月)
시호(諡號)평진(平眞)
생년1687(숙종 13)
졸년1767(영조 43)
시대조선중기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출신지순천
저서『상월대사시집(霜月大師詩集)』

[상세내용]

새봉(璽封)
1687년(숙종 13)∼1767년(영조 43). 조선 중기의 대선사(大禪師). 화엄종사(華嚴宗師)‧대흥사(大興寺) 13대종사(大宗師) 중의 1인. 자는 혼미(混迷), 호는 상월(霜月). 성은 손씨(孫氏). 순천 출신.

11세 조계산 선암사(仙嚴寺)극준(極俊)을 은사로 출가하여 16세 때 화악(華嶽)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18세 때 설암(雪巖)을 참배하고 담론하였다. 설암은 그의 도가 깊음을 알고 의발(衣鉢)을 전수하였다.

그뒤 벽허(碧虛)남악(南岳)환성(喚惺)연봉(蓮峰) 등의 고승들을 찾아 심인(心印)을 얻었다.

1713년(숙종 39) 선암사에 돌아와 개당(開堂)을 하자 수많은 수행자가 법(法)을 구하였다.

또한, 1750년(영조 26) 선교도총섭 주표충원장 겸 국일도대선사(禪敎都摠攝主表忠院長兼國一都大禪師)가 되었고, 1754년 선암사에서 화엄대회(華嚴大會)를 열었을 때는 모인 사람이 1,200명을 넘었다.

1767년 10월, 81세의 나이로 “물은 흘러서 바다로 가고 달은 떨어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水流元去海 月落不離天).”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였으나 사리를 얻지 못해서 문인 탁준(卓璿)이 유골을 가지고 묘향산에 이르러 쇄골을 하려 할 때 갑자기 그 안에서 3매의 공주(孔珠)를 보았다. 하나는 오도산(悟道山)에, 나머지 둘은 선암사대흥사에 각각 나누어 봉안하였다. 언제나 문자보다는 계율과 진해(眞解)를 존중하였다.

그러나 공적견(空寂見)에 떨어지는 편협함보다는 화엄정신을 생활화하였고, 일상수행법(日常修行法)의 하나로 매일 1불(一佛)과 5보살(五菩薩)의 명호를 5,000번씩, 그리고 염불을 1,000번씩 일일이 염주로써 수를 헤아리며 외웠다.

그는 계율을 엄정히 지킴으로써 초학자의 귀감이 되었고, 강론(講論)에 임해서는 경의 진수를 밝혀서 대중의 어리석음을 깨우쳤으며, 마음을 가르칠 때는 지혜를 증득함을 법문(法門)의 중심으로 삼아 무명(無明)을 깨닫게 하였다.

언제나 제자들을 대할 때는 부드러움으로 했으며, 학자들에게는 문자를 떠난 진리를 설파하여 마음의 본원을 찾도록 권유하였다. 이밖에도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을 천명하였다.

유가의 아직 드러나지 않은 기상(氣像)은 불가의 여여(如如)한 이(理)와 같고, 유가의 태극(太極)은 불가의 일물(一物)과 같으며, 유가의 이일분수(理一分殊)는 불가의 일심만법(一心萬法)과 같다고 하는 등, 유교와 불교의 차별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매일 자시에 반드시 북두칠성을 향해 절하고 심증실천(心證實踐)의 법으로 삼았는데, 이는 조선시대 불교의 고승이 북두숭배(北斗崇拜)한 최초의 사료상의 등장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칠성신앙은 이러한 습관의 흐름이라고 보겠다.

저서로 『상월대사시집(霜月大師詩集)』 1권이 있다.

[참고문헌]

東師列傳(覺岸)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집필자]

김위석(金渭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