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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하(鄭觀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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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수백(受百)
생년1685(숙종 11)
졸년1757(영조 33)
시대조선중기
본관영일(迎日)
활동분야문신
정천(鄭洊)

[상세내용]

정관하(鄭觀河)
1685년(숙종 11)~1757년(영조 33).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수백(受百)이다. 본관은 영일(迎日)이고, 출신지는 한양(漢陽)이다.

부친은 중훈대부(中訓大夫) 전행영춘현감(前行永春縣監) 정천(鄭洊)이다. 처부는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정구(沈廷耉)이다. 형은 정태하(鄭泰河)이고, 동생은 정익하(鄭益河)‧정복하(鄭復河)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시 생원 3등에 3위로 합격하였다. 관직은 영천수령(永川守令)‧정선군수(旌善郡守)‧성주목사(星州牧使)‧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712년(숙종 38)부터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문묘(文廟) 종사(從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이후 전국적 사림운동으로 확대되는 배경에서 관학유생(館學儒生)으로 자리하던 정관하(鄭觀河)도 1715년(숙종 41)에 김장생의 문묘종사를 세 번이나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던 바 있다. 결국 1717년(숙종 43) 상소가 받아들여져 김장생은 문묘에 배향되었다.

1716년(숙종 42) 성균관(成均館)의 재임(齋任)으로 있을 때 박광세(朴光世) 등이 상소하여 윤증(尹拯)을 욕되게 하였다고 승문원(承文院)의 이광보(李匡輔) 등이 그 동안의 관례에 따라 일정기간 과거를 볼 수 없게 하는 벌을 내렸는데, 정관하가 식당에 들어가 벌방(罰榜)을 철거하고 승문원(承文院)으로 돌려보내면서 함께 벌을 받았다. 1739년(영조 15) 동생 정익하(鄭益河)가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재직 중이었는데, 정관하가 영천수령(永川守令)에 제수되자 동생 정익하가 면직(免職) 상소를 청하였다. 1751년(영조 27) 정선군수(旌善郡守) 시절에 지은 시 구절인 ‘찰어대(察魚臺)’가 1779년(정조 3) 정선(旌善) 찰어대(察魚臺) 바위에 새겨졌다.

1747년(영조 23) 성주목사(星州牧使) 재임 중 6대조 정철(鄭澈)의 『송강가사(松江歌辭)』를 성주에서 간행하였는데, 권말에 추기(追記)를 실었다.

슬하에 아들 정완(鄭梡)‧정련(鄭槤)‧정환(鄭桓)을 두었다.

[참고문헌]

司馬榜目純祖實錄
英祖實錄

[집필자]

구은희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