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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호(梁廷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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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직부(直夫)
생년1683(숙종 9)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남원(南原)
활동분야문신
양성규(梁聖揆)

[상세내용]

양정호(梁廷虎)
1683년(숙종 9)~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직부(直夫)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양석구(梁錫九)이고, 조부는 양중하(梁重厦)이며,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간원헌납(行司諫院獻納) 양성규(梁聖揆)이다. 외조부는 이여발(李汝發)이고, 처부는 유진운(柳振運)이다. 동생으로 양정린(梁廷麟)이 있다.

1711년(숙종 37) 식년시에 생원 3등 39위로 합격하였으며, 1712년(숙종 38) 정시에 장원으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지평(持平)‧집의(執義)‧사간(司諫)‧양주목사(楊州牧使)‧승지(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722년(경종 2) 사은진주(謝恩陳奏) 겸 동지정사(兼冬至正使)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 등과 함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4년(영조 즉위년) 양주목사 시절 양주의 호구(戶口)는 많지 않은데 군액(軍額)이 너무 많다며 감액해줄 것을 청하면서 군포(軍布)의 탕감도 청하였다. 그리고 남한산성(南漢山城)과 북한산성에 보내질 쌀을 양주읍에 그대로 두게 할 것 등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1725년(영조 1) 1722년의 임인년 옥사를 다스리는 직분에 있었던 죄로 삭탈관직을 당해 문외송출 되었다가 1727년(영조 3)에 석방되어 다시 임용되었다.

1746년(영조 22) 풍기군수 시절 병든 몸으로 고을을 다스리고 있을 때 지평 남혜로(南惠老)로 먼저 파직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올라가 파직되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景宗實錄
英祖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