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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겸(李濟兼)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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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달(士達)
호(號)두릉(杜陵)
호(號)창랑(滄浪)
호(號)녹은(鹿隱)
호(號)창랑자(滄浪子)
생년1683(숙종 9)
졸년1742(영조 18)
시대조선중기
본관진성(眞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동표(李東標)
조부이운익(李雲翼)
증조부이지형(李之馨)
외조부권협(權鋏)
묘소녹동(鹿洞)

[상세내용]

이제겸(李濟兼)
1683년(숙종 9)∼1742년(영조 18).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선경(善慶), 사달(士達), 호는 두릉(杜陵), 창랑(滄浪), 창랑자(滄浪子), 녹은(鹿隱).

송재(松齋) 이우(李堣)의 7세손으로, 증조부는 이지형(李之馨)이고, 조부는 이운익(李雲翼)이며, 부친은 나은(懶隱) 이동표(李東標)이고 외조부는 권협(權鋏)이다. 32세 되던 1714년(숙종 40) 갑오(甲午)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갑진년(1724)에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천거되었다. 43세 되던 1725년(영조 1)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4위로 급제한 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을 역임하였다. 율봉도찰방으로 부임한 이듬해인 1728년(영조 4)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고 반란군이 율봉의 역마를 모두 약탈해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도순무사(都巡撫使)오명항(吳命恒)에게 사태의 전말을 보고하고 관군을 기다리며 의병을 규합하고자 하였는데 그 과정 중에 반란이 진압되었다. 그런데 가담자를 조사하는 중에 강필신(姜必信)이라는 인물이 자신이 처벌을 피하고자 ‘율봉도찰방이 반란군에게 역마를 제공하였다’고 무고(誣告)를 하여, 이 일을 빌미로 선천(宣川)으로 유배되었다가 강원도 제천으로 이배(移配)된 지 3년 뒤인 1735년(영조 11)에야 풀려났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입록동(入鹿洞)으로 옮겨 살면서 후학을 기르는 데 전념하였다. 59세 되던 1741년(영조17)에 무고가 밝혀져 신원이 회복되어 영조가 다시 중용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다가 6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분묘지는 녹동(鹿洞)이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朝鮮人名辭書

[집필자]

박연희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