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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李眞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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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심(子深)
호(號)반공(盤公)
생년1676(숙종 2)
졸년1709(숙종 35)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무신 > 무신

[상세내용]

이진원(李眞源)
1676년(숙종 2)∼1709년(숙종 35).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자심(子深)이고, 호는 반공(盤公)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정종의 열째 아들 적덕공(積德公)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호조판서(戶曹判書) 증영의정(贈領議政) 효민공(孝敏公) 이경직(李景稷)이고, 조부는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이후영(李後英)이다. 부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증이조참판 이덕성(李德成)과 모친 예빈시정(禮賓寺正) 홍석구(洪錫龜)의 딸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통덕랑(通德郞) 신도(申濤)의 딸 고령신씨(高靈申氏)이다.

어려서는 종조부 효간공(孝簡公) 이정영(李正英)에게 배웠는데, 문장의 뜻을 잘 이해하였다. 자라서는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으로부터 학문을 익혔는데, 스승 최석정으로부터 자신의 제자 중 으뜸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일찍이 「욕기부(浴沂賦)」를 지었는데 만정당(晩靜當) 서종태(徐宗泰)로부터 문장의 재주에 대해 칭송을 들었다. 장성하여서는 문장 짓는 일에 더욱 전념하였는데, 근본은 경전(經傳)에 두고 당송제대가(唐宋諸大家)는 참고만 하였다. 부친으로부터 엄하게 가정교육을 받아 목소리를 크게 하거나 걸음도 허투루 걷는 일이 없었다. 또 부친이 관찰사로 나갔을 때 따라 갔는데, 관청에 머물 때에도 아침저녁 문안 인사를 올리는 일 외에는 종일토록 문을 닫아걸고 독서하는 것 외에 다른 일에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

1699년(숙종 25) 증광시 진사 1등 4위와 1706년(숙종 32) 증광시 생원 1등 장원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706년(숙종 32) 9월 9일 중양절 국제(菊製)에 참여하여 수석을 하였으나 급제를 내리지 않고,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제수하고 시직(侍直)으로 올려주었다.

1704년(숙종 30) 부친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근무지에서 돌아가시자 초상을 치루는 모든 범절에 최선을 다하고, 3년상 중에 아무리 더워도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뜰에 부친이 심은 철쭉나무가 시들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고 감격하였다.

묘는 경기도 양평(楊平) 팔봉산(八峰山)에 있다.

[참고문헌]

西堂私載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