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윤(吳命尹)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624BA85C724B1673X0 |
개명(改名) | 오명시(吳命始) |
자(字) | 이로(伊老) |
생년 | 1673(현종 14) |
졸년 | 1734(영조 10)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해주(海州) |
활동분야 | 유생 |
부 | 오수석(吳遂錫) |
[상세내용]
오명윤(吳命尹)
1673년(현종 14)∼1734년(영조 10)(주1)
. 조선 중기 유생. 자는 이로(伊老), 개명은 오명시(吳命始)(주2)
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오수석(吳遂錫)이다.
1715년(숙종 41) 식년시에서 진사로 합격하였다.
1716년(숙종 42)에는 성균관(成均館)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수학하였는데, 백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대궐로 찾아가서, 윤증(尹拯)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상소를 올렸다. 이 일을 계기로 대신(大臣)들 사이에서는 쟁론이 오가게 되었다. 결국,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상소를 꾸몄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오명윤(吳命尹)은 소두(疏頭)가 되어 자신의 이름을 상소문의 가장 처음에 기록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죄가 가중되었고, 그 결과 변방지역으로 유배 보내졌다. 설서(說書) 조최수(趙最壽) 등은 그에 대한 처분을 취소해주기를 청원하며,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졸년 |
海州吳氏族譜(1771)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함. |
개명 |
海州吳氏族譜(1718, 1771)를 참고하여 개명을 추가함. |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오수석(吳遂錫)이다.
1715년(숙종 41) 식년시에서 진사로 합격하였다.
1716년(숙종 42)에는 성균관(成均館)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수학하였는데, 백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대궐로 찾아가서, 윤증(尹拯)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상소를 올렸다. 이 일을 계기로 대신(大臣)들 사이에서는 쟁론이 오가게 되었다. 결국,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상소를 꾸몄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오명윤(吳命尹)은 소두(疏頭)가 되어 자신의 이름을 상소문의 가장 처음에 기록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죄가 가중되었고, 그 결과 변방지역으로 유배 보내졌다. 설서(說書) 조최수(趙最壽) 등은 그에 대한 처분을 취소해주기를 청원하며,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肅宗實錄
肅宗實錄
[집필자]
정병섭
수정일 | 수정내역 |
---|---|
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3-03-15 | 海州吳氏族譜(1718, 1771)를 참고하여 개명, 졸년을 추가함.[수정자: 이재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