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휘(韓永徽)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55CC601D718B1661X0 |
자(字) | 신보(愼甫) |
생년 | 1661(현종 2)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청주(淸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관련정보]
[상세내용]
한영휘(韓永徽)
1661년(현종 2)∼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신보(愼甫)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증조부는 한경생(韓慶生)이고, 조부는 한유량(韓有良)이다. 부친 한두유(韓斗愈)와 모친 이항(李杭)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696년(숙종 22)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직장 재임 시절 도봉서원 청금록(靑衿錄)에서 소론파 윤증(尹拯)의 이름을 먹으로 지웠던 것 때문에 청요직에 오를 때 비난을 받았다. 1704년(숙종 30) 지평 재직 시절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의 업적을 찬양하고, 후일 노론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만동묘(萬東廟)의 건립을 주장하는 등 노론의 당론을 앞장서서 주장하였다가 조태억(趙泰億) 등 소론파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이후 장령‧정언‧필선‧성천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716년(숙종 42) 동지사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증조부는 한경생(韓慶生)이고, 조부는 한유량(韓有良)이다. 부친 한두유(韓斗愈)와 모친 이항(李杭)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696년(숙종 22)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직장 재임 시절 도봉서원 청금록(靑衿錄)에서 소론파 윤증(尹拯)의 이름을 먹으로 지웠던 것 때문에 청요직에 오를 때 비난을 받았다. 1704년(숙종 30) 지평 재직 시절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의 업적을 찬양하고, 후일 노론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만동묘(萬東廟)의 건립을 주장하는 등 노론의 당론을 앞장서서 주장하였다가 조태억(趙泰億) 등 소론파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이후 장령‧정언‧필선‧성천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716년(숙종 42) 동지사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國朝榜目
[집필자]
김혜영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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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