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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석(李賢錫)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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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봉경(鳳卿)
호(號)서강(西岡)
생년1659(효종 10)
졸년1720(숙종 46)
시대조선중기
본관덕수(德水)
활동분야문신
이준(李畯)

[상세내용]

이현석(李賢錫)
1659년(효종 10)~1720년(숙종 46).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봉경(鳳卿)이고, 호는 서강(西岡)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거주지는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 한산면(韓山面)이다.

고조는 이안진(李安眞)이고, 부친 병조정랑(兵曹正郞) 이준(李畯)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이성석(李聖錫)이다.

1684년(숙종 10) 식년시 생원 3등에 38위로 합격하였다.

1689년(숙종 15) 숙종의 후궁 장씨(張氏: 장희빈)가 낳은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을 때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사저(私邸)로 쫓겨났다. 이때 태학생 신분으로 상소문을 올려 극간(極諫)하였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옥사(甲戌獄事) 후 영의정이 된 남구만(南九萬)이 반대파를 엄하게 응징하지 않자, 김유경(金有慶)과 함께 상소를 올려 쟁론을 펼쳤다. 또 여러 유생들을 이끌고 1686년(숙종 12)에 조사기(趙嗣基)가 명성대비(明聖大妃)를 무고하고 욕한 죄를 용서해서는 안된다며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려, 결국 조사기는 참수형을 당하고 가산을 모두 몰수당하고 말았다.

1716년(숙종 42) 수천 마디의 극언(極言)으로 『가례원류(家禮源流)』에 관련된 일의 초안을 잡아서 잘잘못을 구분하게 하였다.

관직은 종묘부봉사(宗廟副奉事)를 지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承政院日記
肅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