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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선(鄭復先)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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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양중(陽仲)
생년1658(효종 9)
졸년1719(숙종 45)
시대조선중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정복선(鄭復先)
1658년(효종 9)∼1719년(숙종 45).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양중(陽仲)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이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대변하여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어 영의정(領議政)까진 지낸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형조판서(刑曹判書) 정광성(鄭廣成)이고, 조부는 예조참판(禮曹參判) 정만화(鄭萬和)이다. 부친은 정재한(鄭載漢)이고, 생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병조좌랑(行兵曹佐郞) 정재해(鄭載海)이다. 형 정시선(鄭是先)이 있다. 부인은 군수(郡守) 서필성(徐必成)의 딸 숙인(淑人) 연산서씨(連山徐氏)이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총명하여 예습까지 알아서 하였다. 문예(文藝)가 날로 성취되어 1687년(숙종 13) 식년시 진사 3등 12위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 다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에 제수되어 나아갔으나, 인현왕후가 사저에서 죽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다시 관직에 나아가 예도감감조관(禮都監監造官)‧장원서별제‧금부도사(禁府都事)‧전주판관(全州判官)‧협천군수(陜川郡守)‧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여산부사(礪山府使)‧광주목사(光州牧使)‧공조정랑(工曹正郞)‧나주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전주판관 시절 명목에도 없는 세금을 거두던 관리들을 처벌하였으며, 나아간 임지마다 고을의 병폐들을 고치는 데 힘썼으며, 흉년이 들면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쓰고, 세금을 아껴 써서 고을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조정에 훌륭한 관리로 이름이 올려졌다. 나주목사 때 병으로 임지에서 죽자, 상을 치르는 날 다스렸던 고을 전주‧여산‧광주‧나주 백성들이 곡을 하며 끊임없이 따랐다.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석규(鄭錫圭)‧정석로(鄭錫老)‧정석주(鄭錫疇)‧정석원(鄭錫遠)‧정석기(鄭錫耆)‧정석구(鄭錫耉)이다.

묘는 경기도 장단(長湍)에 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西堂私載

[집필자]

이원배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