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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신(黃夏臣)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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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종명(宗明)
생년1656(효종 7)
졸년1723(경종 3)
시대조선중기
본관창원(昌原)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황진(黃璡)

[상세내용]

황하신(黃夏臣)
1656년(효종 7)∼1723년(경종 3).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종명(宗明).

부친 장사랑(將仕郞) 행창릉참봉(行昌陵參奉) 황진(黃璡)의 3남 중 1남으로 태어났으며, 동생 황하민(黃夏民), 황하필(黃夏弼)이 있다. 50세 때 1705년(숙종 31) 을유(乙酉)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2등 25위로 합격하였다. 1722년 참봉(參奉) 송수일(宋秀一)재랑(齋郞)에 배수되었는데 황하신(黃夏臣)송수일의 잘못을 적어서 올린 상서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그 후 어떤 사람이 임금이 내린 비답(批答)을 거짓으로 지어서 호서(湖西) 지방에 전파시킨 일이 있었다. 당시 황하신전라도 김제군수(金堤郡守)로 재임 중이었는데, 1723년에 그 비답을 위조한 것이 황하신이라는 내용이 조보(朝報)에 실려 호중(湖中) 일대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황하신이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며 황하신의 결백을 믿자, 송수일은 은밀히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임금에게 상서(上書)하도록 부탁을 하였다. 결국 황하신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중에서 죽었다. 영종 때인 1725년과 1726년에 걸쳐 영부사(領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임인년(1722)의 옥안에 대해 다시 논의하면서, 황하신의 관작을 회복할 것을 진달하였으나, 선조(先朝)에 설국한 일이 없다하여 끝내 관작은 회복되지 않았다. 황하신의 인품이 본래 성실하고 신중하였기 때문에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였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朝鮮王朝實錄
宋子大全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