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태(金漢泰)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D55CD0DCB1653X0 |
이명(異名) | 김한문(金漢文) |
자(字) | 종지(宗之) |
자(字) | 경천(經天) |
생년 | 1653(효종 4) |
졸년 | 1707(숙종 33)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광산(光山) |
활동분야 | 학생 > 유생 |


[상세내용]
김한태(金漢泰)
1653년(효종 4)∼1707년(숙종 33). 조선 중기 유생. 자는 종지(宗之)이고, 초자는 경천(經天)이며, 초명은 김한문(金漢文)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안동(安東)이다.광성군(光城君) 김약채(金若采)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김백웅(金伯熊)이고, 조부는 김석중(金錫重)이다. 부친 김헌세(金憲世)와 모친 금양령(琴養靈)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금성률(琴聲律)의 딸 봉화금씨(奉化琴氏)이고, 둘째 부인은 김하명(金夏鳴)의 딸 순천김씨(順天金氏)이다.
박사과(博士科)에 선발되었을 때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한양(漢陽: 현 서울)에 있지 않아 쓰이지 못하였다. 고향에서 후생들을 성심껏 지도하여 이끌었으며, 제사와 농사에 인사(人事)의 근본이 있다고 여겼으며, 학문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우선해야 한다고 여기고 실천하였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황(金榥)으로 맏형의 후사를 이었다.
묘는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에 있다.
박사과(博士科)에 선발되었을 때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한양(漢陽: 현 서울)에 있지 않아 쓰이지 못하였다. 고향에서 후생들을 성심껏 지도하여 이끌었으며, 제사와 농사에 인사(人事)의 근본이 있다고 여겼으며, 학문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우선해야 한다고 여기고 실천하였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황(金榥)으로 맏형의 후사를 이었다.
묘는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에 있다.
[참고문헌]
蒼雪齋集
[집필자]
정도상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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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