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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태(鄭齊泰)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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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첨(士瞻)
생년1652(효종 3)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영일(迎日)
활동분야문신
정상징(鄭尙徵)

[상세내용]

정제태(鄭齊泰)
1652년(효종 3)~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사첨(士瞻)이다. 본관은 영일(迎日)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정근(鄭謹)이고, 조부는 정유성(鄭維城)이며, 부친은 정상징(鄭尙徵)이다. 외조부는 이기조(李基祚)이고, 처부는 한후상(韓後相)이다. 형으로 양명학(陽明學)의 1인자인 정제두(鄭齊斗)가 있다.

1678년(숙종 4) 증광시에 진사 3등 40위로 합격하였고, 1682년(숙종 8) 춘당대시에 병과 3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병조정랑(兵曹正郞)‧헌납(獻納)‧겸사서(兼司書)‧부교리(副校理)‧수찬(修撰)‧이조좌랑(吏曹佐郞)‧광주부윤(廣州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1681년(숙종 7) 태학생 신분으로 관직에서 물러나는 송시열(宋時烈)을 만류하는 상소를 올렸다. 1693년(숙종 19)에 연달아 병조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아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부수찬(副修撰)에 재임용되었다.

1697년(숙종 23) 떠돌아다니는 거지들이 무리지어 다니면서 도둑질을 하자 조태채(趙泰采)와 함께 거지들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 줄 것을 청하자, 임금은 바닷가 섬으로 내보내어 쌀죽[米粥]을 먹고 살게 하여 도성 안의 피해를 줄일 것을 명하였다. 같은 해에 여러 대신과 함께 장희빈(張禧嬪)의 오빠 장희재(張希載)를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가 임금의 진노를 샀다. 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언기(李彦紀)가 백성의 재물을 탐한 관리들의 명단을 적어 장계를 올리며 죄줄 것을 청하였을 때 자수하였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肅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