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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영(朴千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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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길보(吉甫)
호(號)농아(聾啞)
생년1619(광해군 11)
졸년1680(숙종 6)
시대조선중기
본관밀양(密陽)
활동분야문신
박정원(朴鼎元)

[상세내용]

박천영(朴千榮)
1619년(광해군 11) 5월 2일~1680년(숙종 6) 7월 23일.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길보(吉甫)이고, 호는 농아(聾啞)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박관(朴寬)이고, 조부는 승사랑(承事郞)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박문충(朴文沖)이다. 부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호조정랑(行戶曹正郞) 박정원(朴鼎元)과 모친 행목사(行牧使)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황수(黃瀡) 딸 창원황씨(昌原黃氏)와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외조부는 권주(權澍)이고, 숙부는 박진원(朴震元)이며, 형은 박만영(朴萬榮)이다.

1652년(효종 3) 증광시에서 진사 3등 32위로 합격하였으며, 1670년(현종 11) 별시문과에서 병과 2위 급제하였다. 관직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병조정랑(兵曹正郞)‧풍기군수(豊基郡守)‧장악원정(掌樂院政)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1671년(현종 12) 정언(正言) 강석창(姜碩昌)으로부터 과장(科場)에서 시권(試券)을 칼로 긁어내어 한 글자를 고치는 부정을 저질렀다며 방목(榜目)에서 이름을 빼달라는 요청이 들어오자 임금이 박천영(朴千榮)의 시권을 들여갔다. 이 일로 그는 물론이고 시험 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한 등록관(謄錄官) 이태서(李台瑞), 지동관(枝同官) 이수경(李壽慶), 사동관(査同官) 박문도(朴文道) 등도 함께 하옥되었다. 그러나 임금으로부터 큰 죄를 물을 정도는 아니라는 말을 듣고 풀려났다. 같은 해에 금구현령(金溝縣令)으로 재임하고 있었는데 당시 아들 박현규(朴玄圭)가 병이 들어 죽었다. 그러자 그는 죄를 지어 유배를 간 죄인 승옥(勝玉)의 모친 애생(愛生)이 앙심을 품고 그가 근무하는 관아 가운데에 독(毒)을 묻어두었으며, 그 독으로 인해 아들이 죽었다며 며느리를 시켜 억울함을 호소하게 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인해서 삭탈관직당하였고, 후에 시권 문제로 방목에서도 이름이 빠지고 홍패(紅牌)마저 불에 태워졌다. 1673년(현종 14) 다시 급제(及第)가 내려졌다. 1675년(숙종 1) 남인이었던 그가 배신하고 서인 측에 서서 풍기군수에 제수되었다. 1707년(숙종 33)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겸 춘추관성균관홍문관제학세자좌부빈객(兼春秋館成均館弘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에 추증되었다.

슬하에 2남 이조참판(吏曹參判) 박현규와 선산부사(善山府使) 박중규(朴重圭)를 두었다.

묘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에 있었으나 6‧25사변 때 실전(失傳)되었으며, 1992년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대신면(大神面)에 비석과 제단을 세웠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顯宗實錄
肅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