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극기(胡克己)
[상세내용]
호극기(胡克己)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 귀화인‧문인. 본관은 파릉(巴陵), 출신지는 중국 호남성 파릉이다. 오봉선생(五峰先生) 호굉(胡宏)과 호안국(胡安國)의 후손이다.
대대로 파릉(巴陵)의 악양루(岳陽樓) 아래에 살았으며 19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도어사대부(都御史大夫)를 지냈다. 명 황제의 명을 받아 1643년(인조 21)에 우리나라에 답례사(答禮使)로 왔다가 명이 청(淸)에 의해 멸망하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하여 파릉 호씨와 가평 호씨의 시조가 되었다.
함경도(咸鏡道) 지방을 떠돌아다니다가 함경남도 북청(北靑) 관아의 북쪽 덕성사(德城社)에서 살았다. 파릉 호씨의 족보에는 경기도 가평 대명연에도 잠시 거주했던 것으로 나온다. 함경남도 북청 덕성면 중장내에 초가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를 지어 은거하다 성동(城洞)에서 생을 마쳤는데, 자손들은 그곳에 대대로 거주하였으며 효종이 그 충성심을 높이 사 그 지방의 조세로 녹을 받도록 하였다.
1725년(영조 1) 호극기의 손자인 호두필(胡斗弼)이 영조(英祖)의 행차 앞에서 화양동(華陽洞) 만동사(萬東祠)를 지켜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영조가 만동묘(萬東廟)의 금병(錦屛) 위에 몸소 호극기의 이름을 썼다. 또 사용(司勇)의 벼슬을 내리고, 조세와 부역을 면제시켰다.
아들 호제백(胡濟伯)을 두었다.
대대로 파릉(巴陵)의 악양루(岳陽樓) 아래에 살았으며 19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도어사대부(都御史大夫)를 지냈다. 명 황제의 명을 받아 1643년(인조 21)에 우리나라에 답례사(答禮使)로 왔다가 명이 청(淸)에 의해 멸망하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하여 파릉 호씨와 가평 호씨의 시조가 되었다.
함경도(咸鏡道) 지방을 떠돌아다니다가 함경남도 북청(北靑) 관아의 북쪽 덕성사(德城社)에서 살았다. 파릉 호씨의 족보에는 경기도 가평 대명연에도 잠시 거주했던 것으로 나온다. 함경남도 북청 덕성면 중장내에 초가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를 지어 은거하다 성동(城洞)에서 생을 마쳤는데, 자손들은 그곳에 대대로 거주하였으며 효종이 그 충성심을 높이 사 그 지방의 조세로 녹을 받도록 하였다.
1725년(영조 1) 호극기의 손자인 호두필(胡斗弼)이 영조(英祖)의 행차 앞에서 화양동(華陽洞) 만동사(萬東祠)를 지켜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영조가 만동묘(萬東廟)의 금병(錦屛) 위에 몸소 호극기의 이름을 썼다. 또 사용(司勇)의 벼슬을 내리고, 조세와 부역을 면제시켰다.
아들 호제백(胡濟伯)을 두었다.
[참고문헌]
靑莊館全書 卷之四十七(磊磊落落書補編)
여지도서(咸鏡道 咸鏡南道安邊都護府邑誌)
여지도서(咸鏡道 咸鏡南道安邊都護府邑誌)
[집필자]
이지은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