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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개(田承漑)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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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개지(漑之)
호(號)모재(茅齋)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담양(潭陽)
활동분야문신
전실(田實)

[상세내용]

전승개(田承漑)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개지(漑之)이고, 호는 모재(茅齋)이다. 본관은 담양(潭陽)이고, 거주지는 충청남도 홍주(洪州: 현 홍성군(洪城郡))이다.

증조부는 전엄(田渰)이고, 조부는 전윤수(田允穗)이며, 부친은 봉정대부(奉正大夫) 행고령현감(行高靈縣監) 전실(田實)이다. 외조부는 이계벽(李桂璧)이고, 처부는 이사원(李師瑗)이다.

1510년(중종 5) 식년시 진사 2등에 15위로 합격하였으며, 1517년(중종 12) 별시 3등에 9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예산현감(禮山縣監)‧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형조정랑(刑曹正郞)‧예빈시정(禮賓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1529년(중종 24) 예산현감에서 주부(主簿)가 된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5품 벼슬인 봉상시판관에 등용해 쓴 것은 잘못이라는 간원(諫院)의 말들이 수차례 있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다가 사헌부(司憲府)에서 다시 청하여 벼슬이 갈리었다. 1530년(중종 25) 형조정랑 시절 대간(臺諫)으로부터 인물됨이 부족하여 송사(訟事)에 실수가 잦아 형관(刑官)에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상소가 있었으나 형조에 사람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체차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대간의 상소로 인해 체직되었다. 1544년(중종 39) 예빈시정 시절에 사헌부로부터 사람이 잡스럽고 거칠 것도 부족하여 관사 안에서 자신이 부리는 관원들과 맞서서 비난을 할 정도로 품행이 비루하다는 상소로 인해 체직되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中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