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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균(李萬鈞)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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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경(重卿)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강진(康津)
활동분야문신
이인문(李仁文)

[상세내용]

이만균(李萬鈞)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사중(士重)‧중경(重卿)이다. 본관은 강진(康津)이고, 거주지는 충청남도 공주(公州)이다.

증조부는 이영기(李英奇)이고, 조부는 이터(李攄)이다. 부친 창신교위(彰信校尉) 이인문(李仁文)과 모친 안민행(安敏行)의 딸 죽산안씨(竹山安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정문형(鄭文炯)의 딸 봉화정씨(奉化鄭氏)이다.

1507년(중종 2) 식년시 생원 3등에 59위로 합격하였고, 1522년(중종 17) 식년시 문과에서 을과 5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예조정랑(禮曹正郞)‧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등을 역임하였다.

1525년(중종 20) 교서관정자 재임 중, 문신(文臣)들을 대상으로 한 정시(庭試)에 표문(表文)의 수석을 차지하여 가자(加資)되었다. 1530년(중종 25) 경성판관(鏡城判官) 재임 중, 부인을 때려서 죽인 우범(禹範)을 형률로 다스리면서 시신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일을 처리한 사실이 드러나 체차(遞差)되었고, 1532년(중종 27) 함경도도사 재임 시절에는 함경감사(咸鏡監司)의 장계에 의해 고을 정사(政事)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파직되었다. 1533년(중종 28) 예조정랑으로 재임 중, 속이 좁고 행실이 천박하다는 이유로 사헌부(司憲府)에서 체직(遞職) 시켜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이 인재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체직 명단에서 이름을 제외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계속해서 체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오자 결국 체직되었다. 1534년(중종 29) 충청도도사 재임 시절에 함경도도사 때 일으킨 물의를 문제 삼는 상소가 수차례 올라가 체직되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中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