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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철(申希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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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명(原明)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원주(原州)
활동분야유생

[상세내용]

신희철(申希哲)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 유생. 자는 원명(原明)이다.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시에서 생원 3등 26위로 합격하였다.

지방에서 살다가 대과를 치르기 위해 1507년(중종 2)에 서울로 올라와서 하원수(河源守)의 집에 머물렀는데, 천문습독관(天文習讀官) 유흥조(柳興祖)와 함께 유여(柳璵)의 집에 가던 길에 사랑채에 나와 있던 하원수를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하원수는 이과(李顆)와 함께 공신(功臣)에서 박탈당한 것을 분개하는 말을 하였고, 서자(庶子) 출신을 임금으로 세울 수 있는지에 대한 말을 하였다. 신희철(申希哲)은 이것이 위험한 발언이라고 말한 뒤 유여의 집으로 향하였으나 유여를 만나지 못한 채 돌아왔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하원수가 자신과 친척관계인 윤귀수(尹龜壽)를 소개해주겠다는 말을 하였다. 또 며칠 후 하원수와 6촌 관계인 금릉수(金陵守) 이금산(李金山)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 자리에서 하원수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역모를 꾸미는 일당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정에서 조사를 하던 중에 하원수는 물론 당시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던 손유(孫洧)를 비롯한 여러 유생을 반역공모 죄목으로 잡아들였는데, 이 일에 연루되어 이과를 비롯한 하원수와 손유가 능치처참(陵遲處斬) 될 때, 신희철은 윤귀수‧윤천령(尹千齡)‧유영(柳榮)‧유흥조(柳興祖) 등과 함께 1백 대의 결장(決杖)을 맞은 후 삼천리 밖으로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中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