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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종(申汝悰)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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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온(仲蘊)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평산(平山)
활동분야문신
신거(申據)

[상세내용]

신여종(申汝悰)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중온(仲蘊)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증조부는 신수복(申守福)이고, 조부는 신영수(申永綏)이며, 부친은 신거(申據)이다. 외조부는 강리행(姜利行)이고, 처부는 김옥경(金玉卿)‧김흥례(金興禮)이다.

1543년(중종 38) 식년시에서 병과 11위로 문과 급제했다.

중종과 인종 조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있었다. 1550년(명종 5)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고 1553년(명종 8)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과 부교리(副校理)가 되었으며, 1556년(명종 11) 사간원헌납(獻納)과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및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이 되었다. 1557년(명종 12)에는 사헌부집의와 홍문관교리(校理)가 되었다.

1558년(명종 13)에 홍문관전한(典翰)이 되었는데 사관이 ‘어리석고 천박하며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였다’고 평하였다. 계속하여 홍문관직제학(直提學)과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및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1559년(명종 14)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나, 왕은 ‘홍문록에 추천된 후보자들에 대한 평가가 엄밀하지 못하다’는 명을 내렸으며, 사관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홍문록에 올랐으니 명기(名器)를 더럽힘이 심하다’고 평한바 있다. 같은 해 공조참의(工曹參議)와 승정원도승지(都承旨) 및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냈다.

1560년(명종 15)에는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사관이 ‘성품이 나약하고 집에 있을 때 규중의 실책이 많았다’고 평하였다. 1561년(명종 16)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는데 사관이 ‘성품이 경솔하고 조행이 없다.’고 평하였다. 이후 승정원 도승지가 되어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565년(명종 20) 7월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10월 수원부사(水原府使)로 있을 때 윤원형(尹元衡)이 개인적으로 부리는 노비 표륜(表倫)이 횡포를 부려도 다스리지 않았다는 죄로 탄핵되어 벼슬이 갈렸으며, 사관은 ‘옳고 그른 것에 어두웠다’고 평하였다. 1566년(명종 21)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광주목사(廣州 牧使)가 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