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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천(徐慶千)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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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선수(善叟)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이천(利川)
활동분야무신

[상세내용]

서경천(徐慶千)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선수(善叟)이다.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1531년(중종 26) 모화관(慕華館)에서 친시(親試)로 치러진 식년시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35년(중종 30) 판관(判官)으로 있을 때 함경북도 안원보(安原堡)에 야인(野人)들이 쳐들어와 권관(權管) 전주남(全周南)이 포박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그를 구하지 않았다는 죄로 벼슬이 한 단계 낮아졌다. 1553년(명종 8) 경흥부사(慶興府使)에 재직하던 당시 함경북도 인근 초곶[草串]에 사는 야인들이 변경을 공격하여 사람이나 가축을 빼앗아 가는 일이 자주 생기고, 이전과는 달리 이 문제에 대해 사죄하지 않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그들을 즉시 토벌해야 된다는 의견과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토벌을 해야 된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이에 명종(明宗)이 즉시 토벌해야 된다는 쪽으로 의견을 택하면서 토벌에 나섰는데 이때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이사증(李思曾)과 함께 초관의 야인들을 토벌하였다.

같은 해에 골간(骨幹)이 함경북도 조산보(造山堡)를 공격해 쳐들어 와 가까스로 골간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으나,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사헌부에서는 서경천(徐慶千)이 골간이 조산보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음에도 미리 무기를 정비하지 않아 조산보를 구원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고, 결국에는 압록강 부근인 만포(滿浦)에 유배되어 일반 병사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후 숙위(宿衛)를 위한 장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시 등용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이민재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