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보(金良輔)
[상세내용]
김양보(金良輔)
미상∼1506년(중종 1).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증조부는 김근(金根)이고, 조부는 김영원(金永源)이다. 부친 김신(金信)과 모친 익녕군(益寧君) 이치(李)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502년(연산군 8) 알성시에서 급제하였다.
1503년(연산군 9)에는 선전관(宣傳官)의 임무를 수행하여, 임금을 따라 서산(西山)의 사냥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신호를 잘못 내려서 임금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이후 의금부(義禁府)에 투옥되어 국문(鞠問)을 받았으며, 결국 1백 대의 장형(杖刑)에 처해졌고, 관직에서도 파직되었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간관(諫官)들과 함께 재차 의금부에 투옥되었으며, 결국 제주(濟州)로 쫓겨나서 종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1506년(중종 1)에 사면되어 유배지에서 풀려났지만, 도중에 해적을 만나 변고를 당하였다. 아들은 김익양(金瀷養)이다.
증조부는 김근(金根)이고, 조부는 김영원(金永源)이다. 부친 김신(金信)과 모친 익녕군(益寧君) 이치(李)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502년(연산군 8) 알성시에서 급제하였다.
1503년(연산군 9)에는 선전관(宣傳官)의 임무를 수행하여, 임금을 따라 서산(西山)의 사냥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신호를 잘못 내려서 임금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이후 의금부(義禁府)에 투옥되어 국문(鞠問)을 받았으며, 결국 1백 대의 장형(杖刑)에 처해졌고, 관직에서도 파직되었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간관(諫官)들과 함께 재차 의금부에 투옥되었으며, 결국 제주(濟州)로 쫓겨나서 종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1506년(중종 1)에 사면되어 유배지에서 풀려났지만, 도중에 해적을 만나 변고를 당하였다. 아들은 김익양(金瀷養)이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집필자]
정병섭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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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