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갈송(片碣頌)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3B8AC08C1A1U9999X0 |
생년 | ?(미상)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절강(浙江) |
활동분야 | 귀화‧유민 > 귀화인 |
출신지 | 절강(浙江) |
[상세내용]
편갈송(片碣頌)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 귀화인. 명(明)나라 신종(神宗) 때 사람으로 중국 절강(浙江) 출신이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李如松) 휘하의 동정명군총병사(東征明軍摠兵使)로 들어와 평양(平壤) 전투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돌아갔다. 이후 정유재란 때 중군도독(中軍都督)으로 다시 입국하여 경남 울산(蔚山) 서생포(西生浦)에서 명나라 원병 제독(提督) 마귀(麻貴)의 부장(部將)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으로 본국이 어지럽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경주(慶州) 금오산(金鰲山)에 은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본국의 아들 편풍세(片豊世), 편풍원(片豊源), 편산보(片山甫)도 금오산에 와서 살았다.
이후 편갈송이 세상을 떠나자 3년 상을 마친 편풍세와 편풍원은 전라남도 나주(羅州)에, 편산보는 만경(萬頃)에 정착하여 살면서 선향(先鄕)인 절강(浙江)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로써 편갈송과 그의 세 아들은 우리나라 절강편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그는 울산(蔚山) 서생포(西生浦) 창표당(蒼表堂)에 배향되었으며, 200여년이 지나 공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전라도 유림의 계청(啓請)으로 나주(羅州)에 감명사(感明祠)를 세워 공을 기렸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李如松) 휘하의 동정명군총병사(東征明軍摠兵使)로 들어와 평양(平壤) 전투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돌아갔다. 이후 정유재란 때 중군도독(中軍都督)으로 다시 입국하여 경남 울산(蔚山) 서생포(西生浦)에서 명나라 원병 제독(提督) 마귀(麻貴)의 부장(部將)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으로 본국이 어지럽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경주(慶州) 금오산(金鰲山)에 은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본국의 아들 편풍세(片豊世), 편풍원(片豊源), 편산보(片山甫)도 금오산에 와서 살았다.
이후 편갈송이 세상을 떠나자 3년 상을 마친 편풍세와 편풍원은 전라남도 나주(羅州)에, 편산보는 만경(萬頃)에 정착하여 살면서 선향(先鄕)인 절강(浙江)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로써 편갈송과 그의 세 아들은 우리나라 절강편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그는 울산(蔚山) 서생포(西生浦) 창표당(蒼表堂)에 배향되었으며, 200여년이 지나 공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전라도 유림의 계청(啓請)으로 나주(羅州)에 감명사(感明祠)를 세워 공을 기렸다.
[참고문헌]
전라남도지
편씨문중편가가족(http://cafe.naver.com/pyunfamily)
한국풍수리지협회(http://www.poongsu.org/name)
편씨문중편가가족(http://cafe.naver.com/pyunfamily)
한국풍수리지협회(http://www.poongsu.org/name)
[집필자]
박상수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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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