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복(姜德福)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C15B355BCF5U9999X0 |
생년 | ?(미상)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진주(晉州) |
활동분야 | 호국 > 의병 |
처 | 양씨(梁氏) |
묘소 | 궁장동(弓藏洞) |
[상세내용]
강덕복(姜德福)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 의병.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은렬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 ?∼1021)의 후손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서 인재를 발탁할 때에, 남원부(南原府)에서 추천하여 감정(監正)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에 가동 100여 명을 거느리고 수성령(宿星嶺)에서 왜적 60여 명을 사살한 뒤에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순절하였다. 아내 양씨(梁氏)는 진중(陣中)으로 달려가 염습을 마친 뒤에, 널 옆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이에 가동 충남(忠男)이 두 사람의 관과 궁검(弓劍)을 거두어 수성령 아래에 장사지냈다. 후세 사람들은 그곳을 궁장동(弓藏洞)이라고 부른다.
은렬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 ?∼1021)의 후손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서 인재를 발탁할 때에, 남원부(南原府)에서 추천하여 감정(監正)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에 가동 100여 명을 거느리고 수성령(宿星嶺)에서 왜적 60여 명을 사살한 뒤에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순절하였다. 아내 양씨(梁氏)는 진중(陣中)으로 달려가 염습을 마친 뒤에, 널 옆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이에 가동 충남(忠男)이 두 사람의 관과 궁검(弓劍)을 거두어 수성령 아래에 장사지냈다. 후세 사람들은 그곳을 궁장동(弓藏洞)이라고 부른다.
[참고문헌]
용성속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디지털남원문화대전(http://namwon.grandculture.net/)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디지털남원문화대전(http://namwon.grandculture.net/)
[집필자]
김은영
대표명 | 강덕복(姜德福) |
성명 | 강덕복(姜德福) |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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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