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량(鄭希亮)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D76CB7C9D1728X0 |
이명(異名) | 정준유(鄭遵儒) |
생년 | ?(미상) |
졸년 | 1728(영조 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초계(草溪) |
활동분야 | 변란 > 반역자 |
부 | 정중원(鄭重元) |
[상세내용]
정희량(鄭希亮)
미상∼1728년(영조 4). 조선 후기의 역신. 본명은 준유(遵儒). 본관은 초계(草溪).
참봉 정중원(鄭重元)의 아들이다. 명문의 자손으로 안음(安陰)에 거주하면서 부귀를 누리다가 순흥으로 이사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박필현(朴弼顯) 등과 공모하여, 영조 즉위 후 벼슬에서 밀려난 소론일파의 호응을 얻어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 왕통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인좌를 도원수로, 스스로는 원수가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청주를 습격하고 한때 안음‧거창‧합천‧삼가 등의 여러 고을을 제압하였으나, 도순문사 오명항(吳命恒)이 이끄는 관군에 패배하였다. 거창에서 선산부사 박필건(朴弼建)과 곤양군수 우하형(禹夏亨) 등에게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참봉 정중원(鄭重元)의 아들이다. 명문의 자손으로 안음(安陰)에 거주하면서 부귀를 누리다가 순흥으로 이사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박필현(朴弼顯) 등과 공모하여, 영조 즉위 후 벼슬에서 밀려난 소론일파의 호응을 얻어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 왕통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인좌를 도원수로, 스스로는 원수가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청주를 습격하고 한때 안음‧거창‧합천‧삼가 등의 여러 고을을 제압하였으나, 도순문사 오명항(吳命恒)이 이끄는 관군에 패배하였다. 거창에서 선산부사 박필건(朴弼建)과 곤양군수 우하형(禹夏亨) 등에게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續朝野輯要
續朝野輯要
[집필자]
유승주(柳承宙)
명 : "희량(希亮)"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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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