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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후(徐厚)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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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덕재(德載)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대구(大丘)
활동분야문신 > 문신
서팽소(徐彭召)

[상세내용]

서후(徐厚)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덕재(德載).

서팽소(徐彭召)의 아들이며, 서거정(徐居正)의 종손(從孫)이다.

1498년(연산군 4) 진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음성으로 유배되었으며, 이듬해는 장(杖) 70의 벌을 받기도 하였다. 중종반정 후 재기용되어 사헌부지평장령 등의 언관(言官)을 역임하였다.

1512년(중종 7) 정조사(正朝使) 이구검(李久儉)을 수행한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학문이 뛰어나서 1516년 의정부이조예조성균관이 합의하여 사유(師儒)에 합당한 인물을 선발할 때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뽑힌 적도 있었다.

1521년 홍문관직제학으로서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을 겸하여 그 전해에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김식(金湜)조광조 등을 간악하다고 극론함으로써 많은 사림으로부터 원망을 들었다.

그는 또 군기(軍器)에 큰 관심을 나타내어 직제학에 재임중이면서 100근이나 되는 강노(强弩)를 만들어 중종에게 바친 바 있고, 이듬해에는 일찍이 만들었던 편조전(鞭條箭)을 개량하여 120근의 궁노(弓弩)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동부승지로 옮겼으며,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으로 역제(驛制)의 개혁과 전선(戰船)의 수리 등 국방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어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한 뒤 1525년 아들 서회(徐嶒)가 역모혐의로 체포되어 한 때 투옥되었다가 영흥부사에 보임되었으며 거기서 시폐 11조를 상소하여 후민생(厚民生)‧정사습(正士習) 등의 주장을 폈다.

다시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1531년 충주목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정치성향 면에서 훈구파로서 사림파의 공격대상이 되었으나 항상 군무(軍務)에 관심을 기울여 『군문요람(軍門要覽)』『장훈원구(將訓元龜)』 등의 책을 엮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榜目
大東野乘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1-03문과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