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서(朴應犀)
[상세내용]
박응서(朴應犀)
미상∼1623년(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사(文士). 영의정 박순(朴淳)의 서자(庶子)이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학문이 깊은 쟁쟁한 문사였으나 서출(庶出)이어서 출세의 길이 막혀 있었다. 서얼차대(庶孽差待)에 불만을 품고 같은 명문의 서자들인 김평손(金平孫)‧심우영(沈友英)‧서양갑(徐羊甲)‧박치의(朴致毅)‧박치인(朴致仁)‧이경준(李耕俊) 등과 강변칠우(江邊七友) 또는 죽림칠우(竹林七友)라 자처하며, 여주의 북한강근처에서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으며, 정자(亭子)의 이름을 무륜당(無倫堂)이라 하였다.
또 이재영(李再榮)‧허균(許筠) 등과도 교유하였다. 광해군 즉위초에 이들이 연명상소(連名上疏)하여 서얼허통(庶孽許通)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12년(광해군 4)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6,700냥을 약탈하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이듬해 일당과 함께 검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자신의 화를 면하게 해주겠다는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등의 꾐에 빠져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자 강탈하였다고 거짓자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영창대군은 강화에 유배되고 인목대비의 아버지이며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은 사형, 기타 소북파(小北派)들이 숙청당한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칠서일당(七庶一黨)이 모두 연루되어 치죄되었으나 그 혼자만 죄가 용서되어 석방되었다. 이들의 활약이 「홍길동전」의 주제가 되었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잡혀 주살되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학문이 깊은 쟁쟁한 문사였으나 서출(庶出)이어서 출세의 길이 막혀 있었다. 서얼차대(庶孽差待)에 불만을 품고 같은 명문의 서자들인 김평손(金平孫)‧심우영(沈友英)‧서양갑(徐羊甲)‧박치의(朴致毅)‧박치인(朴致仁)‧이경준(李耕俊) 등과 강변칠우(江邊七友) 또는 죽림칠우(竹林七友)라 자처하며, 여주의 북한강근처에서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으며, 정자(亭子)의 이름을 무륜당(無倫堂)이라 하였다.
또 이재영(李再榮)‧허균(許筠) 등과도 교유하였다. 광해군 즉위초에 이들이 연명상소(連名上疏)하여 서얼허통(庶孽許通)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12년(광해군 4)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6,700냥을 약탈하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이듬해 일당과 함께 검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자신의 화를 면하게 해주겠다는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등의 꾐에 빠져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자 강탈하였다고 거짓자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영창대군은 강화에 유배되고 인목대비의 아버지이며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은 사형, 기타 소북파(小北派)들이 숙청당한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칠서일당(七庶一黨)이 모두 연루되어 치죄되었으나 그 혼자만 죄가 용서되어 석방되었다. 이들의 활약이 「홍길동전」의 주제가 되었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잡혀 주살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明倫錄
澤堂別集
七庶之獄(李相佰,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仁祖實錄
明倫錄
澤堂別集
七庶之獄(李相佰,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명 : "응서(應犀)"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