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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장(金壽長)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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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평(子平)
호(號)노가재(老歌齋)
생년1690(숙종 16)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활동분야음악 > 가인
출신지완산(完山: 지금의 全州)

[상세내용]

김수장(金壽長)
1690년(숙종 16)∼미상. 조선 후기의 가인(歌人). 완산(完山: 지금의 全州) 출신. 자는 자평(子平), 호는 십주(十洲, 十州) 또는 노가재(老歌齋).

숙종조에 기성(騎省)서리(書吏)를 지냈다. 김천택(金天澤)과 더불어 숙종영조기를 대표하는 쌍벽의 가인이다. 그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69년(영조 45) 80세까지 생존하였음은 확실하다.

활약과 공적은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1755년에 3대 시조집의 하나인 『해동가요』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을해본(일명 박씨본)이며, 1763년에 이를 고쳐 계미본(일명 주씨본)을 편찬하였다.

그뒤로도 80세가 넘도록 이 책의 개수를 계속하였다. 오랜 기간에 걸쳐 보수를 거듭함으로써 완전한 가집을 만들고자 한 그의 집념을 볼 수 있다.

둘째는, 가단의 지도자로서 가악의 발전과 후배양성을 위하여 힘썼다는 점이다.

1760년에는 서울 화개동(花開洞)에 노가재를 짓고 가악활동을 주도해나갔다. 노가재 경영을 전후하여 노가재가단(老歌齋歌壇)이 이루어진 듯하다.

셋째는, 시조작가로서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작품은 그가 편찬한 『해동가요』 을해본에 16수, 계미본에 117수, 『청구가요』에 3수 등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같은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 12수이다.

같은 작품을 제외한 124수와 기타의 가집에 전하는 5수를 합하여 129수에 이르는 작품을 남겼다. 을해본의 발문에서 자신의 작품을 20여수 싣는다고 하였고, 계미본의 서문에서는 149수를 싣는다고 하였으나, 실제로 수록된 작품은 그 수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은 서문‧발문을 쓴 뒤에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다시 손질하거나 제거해버린 결과일 것이다. 을해본에 실었던 16수가 계미본에서는 4수만 그대로 남았다. 8수는 부분적으로 고쳤으며, 4수는 제거해버린 것으로도 그 작품 선별의 엄정함을 알 수 있다.

작품은 대체로 세 계열로 구분된다. 첫째, 양반‧사대부들의 작품경향을 답습한 것들이다. 계심(戒心)‧수분(守分)‧자적(自適)을 내용으로 한 작품들이 비교적 많으며, 충(忠)‧신(信) 등의 낡은 주제도 있는데, 이와같은 내용은 양반‧사대부들의 시조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양반들의 의식세계를 지향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김천택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앞 사람의 작품경향을 맹목적으로 흉내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작품을 엄밀히 검토해볼 때, 감정을 허식화하거나 관념화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고, 거짓없고 진실한 표출을 꾀하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그의 작품에서는 강호지락(江湖至樂)을 내용으로 한 것이 없으며, 따라서 ‘백구(白鷗)’‧‘노화(蘆花)’‧‘낚싯대’ 등의 용어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현상은 인생관‧시가관에서 연유된 결과라 보인다.

둘째, 감정의 솔직한 노출은 서민의식과 결부되어 서민들의 생활감정을 적나라하게 나타낸 작품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 계열에 속하는 작품들은 전연 그 면모를 달리하는 것으로, 이러한 작품에서 그의 참된 면모를 볼 수 있으며, 문학적으로 성공한 것도 이 가운데에 많다.

특히, 애정을 노래한 작품에서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우리나라의 애정시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주제는 눈앞에 없는 임을 그리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그러한 인습적인 세계에서 벗어나서 치밀한 상상력과 구상적인 수법으로 폭넓은 아량을 작품에 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은 파격의 사설시조를 통해서 많이 나타난다. ‘나는 지남석(指南石)이런가......’ 하는 작품에서는 남녀를, 각각 앉아도 붙고 서도 따라서 떨어지지 않는 ‘지남석’과 ‘날바늘’에 견주기도 하였다.

그는 사설시조를 38수나 남겼으며, 대개의 사설시조가 무명씨작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하여 그는 이름을 밝혀놓았다. 양반세계를 지향하면서도 서민층의 성격을 짙게 보여주는 점이 김천택과의 분명한 차이점이다.

셋째, 가악생활과 관련있는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공명이나 부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풍류 속에서 흥취와 호기를 마음껏 발휘하였다. “노갓치 죠코 죠흔 줄을 벗님네 아돗든가...... 남아(男兒)의 이 호기(豪氣)를 나는 죠화노라.”는 사설시조가 그러하다.

세속의 기풍을 오히려 자랑으로 삼으면서 가객으로서의 한평생에 긍지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은 김천택 세대의 한계를 넘어서서 서민층에 한층 밀착된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구실을 하였다.

이와같이 그는 가집의 편찬자‧시조작가, 그리고 가단의 지도자로서 18세기를 대표할만한 예술인이라 하겠다.

그러나 새로운 방향에서의 응축된 표현을 마련하지 못한 데 그 한계가 있다.

[참고문헌]

海東歌謠
肅宗‧英祖期의 歌壇硏究(崔東元, 釜山大學校論文集 22, 1976)
敬亭山歌壇과 老歌齋歌壇에 對하여(崔東元, 國語國文學 13‧14, 釜山大學校, 1977)
南坡時調와 老歌齋時調의 性格(崔東元, 韓國文學論叢 1, 韓國文學會, 1978)
金壽長論(鄭炳昱, 한국고전의 재인식, 弘盛社, 1979)
시조의 변이와 사설시조의 등장(조동일, 한국문학통사 3, 지식산업사, 1984)

[집필자]

최동원(崔東元)
대표명김수장(金壽長)
수장(壽長)
성명김수장(金壽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