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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운(吳光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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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영백(永伯)
호(號)약산(藥山)
시호(諡號)충장(忠章)
생년1689(숙종 15)
졸년1745(영조 21)
시대조선중기
본관동복(同福)
활동분야문신 > 문신
오상순(吳尙純)
저서『약산만고(藥山漫稿)』

[상세내용]

오광운(吳光運)
1689년(숙종 15)∼1745년(영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영백(永伯), 호는 약산(藥山).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오상순(吳尙純)의 아들이다.

1714년(숙종 40) 사마시를 거쳐,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설서(說書)에 올라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서연관(書筵官)이 되었으며 승지를 지냈다.

1728년(영조 4) 홍문관수찬교리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이해 3월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변을 아뢰고,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날 저녁 청주에서 이봉상(李鳳祥)남정년(南廷年) 등이 적에게 살해되자 사람들은 그의 선견(先見)에 탐복하였다.

영조의 탕평책(蕩平策)하에서 청남(淸南)세력의 정치적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1729년에 올린 상소에서 “무릇 탕평의 근본은 전하가 일심(一心)으로 최상의 목표를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이에서 행하는 모든 시책과 행위는 지극히 공적이어서 사사로움이 없고, 지극히 올바르므로 편벽됨이 없게 됩니다.”라고 하면서, 남(南)‧서(西)‧노(老)‧소(少)를 막론하고 당인(黨人) 중에서 명류(名流)로 지칭되는 인물들을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해에 영남안핵어사(嶺南按覈御史)가 되고, 이어 대사헌을 거쳐 1737년 대사간이 되었다.

1740년 부사과(副司果)가 되었다.

이때 소론인 원경하(元景夏)정우량(鄭羽良) 등과 함께 다시 대탕평론을 내세워 “붕당(朋黨)을 없애되 명절(名節)을 숭상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였다.

1743년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1744년 사직(司直)을 거쳐 개성유수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났으며, 유형원(柳馨遠)의 저서인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서문을 썼다.

저서로는 『약산만고(藥山漫稿)』가 있다. 이조판서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장(忠章)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藥山漫稿
蕩平論의 展開와 政局의 變化(朴光用, 韓國史論 10, 1984)

[집필자]

정덕기(鄭德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