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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옥(徐宗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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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온숙(溫叔)
호(號)학서(鶴西)
시호(諡號)문민(文敏)
생년1688(숙종 14)
졸년1745(영조 21)
시대조선중기
본관대구(大丘)
활동분야문신 > 문신
서문유(徐文裕)

[상세내용]

서종옥(徐宗玉)
1688년(숙종 14)∼1745년(영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온숙(溫叔), 호는 인재(訒齋) 또는 학서(鶴西).

판서 서문유(徐文裕)의 아들이다.

1725년(영조 1)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28년 사헌부지평을 제수받은 뒤 이조좌랑경연검토관대사성세자시강원보덕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733년 이조참의가 되어 당시 정치의 폐단 10개조를 들어 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즉, 국가운영의 원칙을 세우고, 기강을 바로잡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고, 정직한 관리를 표창하며, 인재를 뽑아 쓰고, 불쌍한 백성들을 구제하며, 국방에 힘쓰고, 재정을 잘 관리하여 쓸데없는 낭비를 줄일 것을 역설하였다.

그뒤 병조참지전라도관찰사대사간함경도관찰사대사헌 등을 거쳐 1739년에는 진위겸사은부사(陳慰兼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40년 평안도관찰사, 다음해 예조‧이조판서, 우참찬이 되었고 1742년에는 사정당상(查正堂上)이 되어 훈신(勳臣)의 후손은 9대까지 군역을 면제할 것을 결정하였다.

1745년 호조판서 재임중에 죽었다. 영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충후관대(忠厚寬大)한 인물이라 평하고, 무신란을 예견한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1748년 문민(文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保晩齋集

[집필자]

이재호(李載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1-03문과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