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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홍(蔡之洪)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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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군범(君範)
호(號)삼환재(三患齋)
호(號)봉계(鳳溪)
호(號)사장와(舍藏窩)
생년1683(숙종 9)
졸년1741(영조 17)
시대조선중기
본관인천(仁川)
활동분야학자 > 유생
채영용(蔡領用)
유씨(柳氏)
외조부승주(承胄)
저서『봉암집(鳳巖集)』

[관련정보]

[상세내용]

채지홍(蔡之洪)
1683년(숙종 9)∼1741년(영조 1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군범(君範), 호는 봉암(鳳巖)삼환재(三患齋)봉계(鳳溪)사장와(舍藏窩).

부친은 첨지중추부사 채영용(蔡領用)이며, 모친은 유씨(柳氏)승주(承胄)의 딸이다.

16세 때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말을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글자를 가르치면 이를 해득하였으며, 어머니가 「등왕각서(滕王閣序)」를 구수(口授)하면 단번에 암송하는 재질이 있었다.

8세에 시를 짓기 시작하였고, 또한 『상서(尙書)』 기삼백(朞三百)의 주(注)를 통해(通解)하였다고 한다.

권상하의 문하에 들어가서는 스승으로부터 남다른 총애를 받았으며, 동문인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柬)윤혼(尹焜) 등과 친교, 학문을 강론하였다.

스승의 영향으로 과거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위기학(爲己學)에 전념, 지행일치(知行一致)의 학문의 실천적 수행에 더욱 힘써, 당시 많은 학자들로부터 추중(推重)받는 바 되었다.

뛰어난 학행으로 암행어사 황구하(黃龜河)와 도(道)의 관찰사 등이 추천, 1718년(숙종 44)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1721년(경종 1)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의 죄를 논척하는 상소를 올리고 구운산(九雲山)에 들어가 은거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1725년(영조 1) 노론이 다시 집권하자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민진원(閔鎭遠)의 강력한 요청으로 경연관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있다가 역시 사퇴하였다.

그뒤 빙고별제(氷庫別提)로 다시 기용되어 몇개월 뒤 부여현감으로 나갔다가 사퇴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변희하(卞熙夏) 등 고을 선비들과 함께 격문을 써붙여 적도(賊徒)들에 가담하는 자들을 회유하는 한편, 의병을 모집하던 중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그해 가을에 청산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의 상을 당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1740년 형조좌랑에 임명되고,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를 거쳐 공홍도도사(公洪道都事)에 취임하였다가 사퇴하고 귀향, 그 이듬해 죽었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당시 심성론(心性論)으로 유학계가 호락논쟁(湖洛論爭)을 벌일 때 한원진과 함께 호론에 속하였다.

또한, 경학‧예학을 비롯하여 역사‧천문‧지리‧상수(象數) 등에도 박통하였다.

저서로는 『봉암집(鳳巖集)』 8책을 비롯하여 『성리관규(性理管窺)』『세심요결(洗心要訣)』『독서전보(讀書塡補)』『천문집(天文集)』 등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人物志
熏湖集
資料韓國儒學史草稿(李丙燾)

[집필자]

이민식(李民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