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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택(金春澤)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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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우(伯雨)
호(號)북헌(北軒)
시호(諡號)충문(忠文)
생년1670(현종 11)
졸년1717(숙종 43)
시대조선중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진귀(金鎭龜)
조부김만기(金萬基)
저서『북헌집』
저서『만필(漫筆)』

[상세내용]

김춘택(金春澤)
1670년(현종 11)∼1717년(숙종 4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부친은 호조판서김진구(金鎭龜)이며, 조부는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金萬基)이다. 증조모 윤씨에게서 학업을 익히고, 종조부 김만중(金萬重)으로부터 문장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여 김수항(金壽恒)의 탄복을 받기도 하였다.

서인‧노론의 중심가문에 속하였으므로 항상 정쟁의 와중에 있었으며, 특히 1689년의 기사환국 이후로 남인이 정권을 담당하였을 때에는 여러 차례 투옥, 유배되었다.

1694년 재물로 궁중에 내통하여 폐비 민씨를 복위하게 하고, 정국을 뒤엎으려 한 혐의로 체포되고 심문받았으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면서 풀려났다.

그뒤 노론에 의해서는 환국의 공로자로 칭송받았으나, 남구만(南九萬) 등의 소론으로부터는 음모를 이용한 파행적 정치활동을 행하였다고 공격받았다.

1701년 소론의 탄핵을 받아 부안(扶安)에 유배되었으며,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를 모해하였다는 혐의를 입어 서울로 잡혀가 심문을 받고, 1706년 제주로 옮겨졌다.

시재가 뛰어나며 문장이 유창하였고,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조판서를 추증받았으며,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 『북헌집』 20권 7책과 『만필(漫筆)』 1책이 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北軒集
燃藜室記述

[집필자]

윤혁동(尹焃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