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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민(李裕民)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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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덕유(德裕)
시호(諡號)정민(貞敏)
생년1658(효종 9)
졸년1729(영조 5)
시대조선중기
본관청해(靑海)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핵(李翮)

[상세내용]

이유민(李裕民)
1658년(효종 9)∼1729년(영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덕유(德裕). 개국공신 이지란(李之蘭)의 후손으로, 첨지중추부사 이핵(李翮)의 아들이다.

1696년(숙종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병조좌랑부안현감을 거쳐 홍주목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은 권문세가의 횡포를 조정에 알려 토지를 백성에게 반환하도록 하였다. 충주의주 등 각 지방관을 지내고, 수원부사가 되어 백성을 잘 다스림으로써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714년 지평장령정언 등을 거쳐 1718년 승지에 이어 형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여주목사, 뒤에 함경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721년(경종 1) 한성부좌윤, 이어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해 이진유(李眞儒) 등 소론에게 배척을 당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727년(영조 3) 사직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이에 앞서 임금이 이유민을 발탁하여 병조판서를 삼았다가 특진에 따른 논란이 일자 도로 거두고, 대신 품계를 고쳐 자헌대부를 내린 것이다.(주1)
자헌대부임명
『영조실록』 11권, 1727년 4월 23일조 "이유민을 자헌 대부로 삼다" 참고.
이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28년 공조판서로서 이인좌(李麟佐)의 난의 평정을 도와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도총관지의금부사를 지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楓皐集

[집필자]

오갑균(吳甲均)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