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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준(尹德駿)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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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방서(邦瑞)
호(號)일암(逸庵)
시호(諡號)효정(孝靖)
생년1658(효종 9)
졸년1717(숙종 43)
시대조선중기
본관남원(南原)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반(尹攀)

[상세내용]

윤덕준(尹德駿)
1658년(효종 9)∼1717년(숙종 4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방서(邦瑞), 호는 일암(逸庵). 관찰사 윤반(尹攀)의 아들이다.

1679년(숙종 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기거주(起居注)정언지평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701년 대사간으로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관련된 장희재(張希載)의 죄를 다스렸다.

이때 많은 사람들의 피해와 세자(뒤의 경종)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대신들의 문책에 대하여 극형에 처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뒤 형조판서에 승진하여, 오랫동안 미결로 있었던 소송사건을 신속히 처리하여 주위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어서 한성부판윤우참찬예조판서공조판서종부시제조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716년 사건처리에 공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한때 파직되었으나, 뒤에 좌참찬이 되어 다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이때 과옥사건(科獄事件)이 일어나 이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모두 꺼려 회피할 때, 그는 공평하고 정확하게 조사하여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금오(金吾: 의금부)에서 수사한 일을 잘못 처리하였다 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성품이 단정하고 강직하여, 직간할 때 왕의 뜻에 거슬려 엄한 교지를 받아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릴 만큼 영특하고 총명하였으며, 경서와 문장에 능하였다.

특히, 국조전례(國朝典禮)에 상통하였고, 문장은 조리가 있었으며, 시도 간아(簡雅)하였다. 해서‧초서‧전서‧예서에 재주가 있어 한때 사대부들 사이에 그의 금석지각(金石之刻)이 유행하였다.

말년에 서사(書史)로서 여생을 보냈다. 뒤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청으로 복관되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耳溪集

[집필자]

김양수(金良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