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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직(李萬稷)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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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장(子長)
생년1654(효종 5)
졸년1727(영조 3)
시대조선중기
본관한산(韓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태연(李泰淵)
문화유씨(文化柳氏)
조부이덕사(李德泗)
외조부유경집(柳敬輯)
묘소공주(公州) 줄동(茁洞)

[상세내용]

이만직(李萬稷)
1654년(효종 5)∼1727년(영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장(子長).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1세손이다. 조부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이덕사(李德泗)이고, 부친은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가선대부(嘉善大夫) 이태연(李泰淵)이다. 모친은 문화유씨(文化柳氏)관찰사 유경집(柳敬輯)의 딸이다.

일찍이 충정공(忠正公) 이세백(李世白)이 그를 일러 “이공은 나라의 그릇이다. 어찌 그로 음직(蔭職)에 묻혀 평범한 자들로 앞서게 하겠는가!”라는 말을 할 정도로 신망을 얻었다고 전하나, 관직에 나가게 된 것은 1699년(숙종 25) 46세라는 늦은 나이에 기묘식년사마시(己卯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2등으로 합격하면서부터이다.

처음 후릉참봉(厚陵參奉)에 보임되었다가 전설사별검(典設司別檢)으로 전직되었다. 그 뒤 선친의 발탁으로 도감랑(都監郞)이 되었다.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감찰(監察),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역임했다.

외직으로는 임피현령(臨陂縣令), 영천군수(永川郡守),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재직했으며,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서는 선혜랑(宣惠郞)이 되었는데, 곧 다시 선산부사(善山府使)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선혜청의 사정으로 유임되었다. 후에 다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가, 원주목사(原州牧使)광주부윤(廣州府尹)을 거쳤다. 지방관으로 나가있을 때, 많은 선정을 베풀어 두터운 인망을 얻었다고 전한다.

말년에는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판결사(判決事)형조참의(刑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1727년(영조 3) 11월 28일 향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주(公州) 줄동(茁洞)에 장사지냈는데, 부인 정씨와 합장하였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집필자]

고윤수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