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창도(閔昌道)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BFCCC3DB3C4B1654X0 |
자(字) | 사회(士會) |
호(號) | 화은(化隱) |
생년 | 1654(효종 5)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여흥(驪興)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민희(閔熙) |
[관련정보]
[상세내용]
민창도(閔昌道)
1654년(효종 5)∼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회(士會), 호는 화은(化隱). 좌의정 민희(閔熙)의 아들이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80년 정언이 되었고, 1689년 부제학 유명현(柳命賢) 등이 홍문록(弘文錄)을 만들 때 1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그해에 헌납‧부교리를 지냈고,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중 호당시(湖堂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숙종으로부터 상으로 표피(豹皮)를 받았다.
1690년 헌납으로 사서(司書)를 겸하였고, 이어 이조좌랑‧승지를 거쳐 1691년 경상도관찰사, 이듬해 부제학을 거쳐, 1693년 이조참의, 1694년 대사성이 되었으며,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장수(長水)에 유배되었다.
특히,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곽산의 개원사(開元寺) 불량비문(佛糧碑文)과 영변의 보현사(普賢寺) 월저대사비문(月渚大師碑文)을 찬하였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80년 정언이 되었고, 1689년 부제학 유명현(柳命賢) 등이 홍문록(弘文錄)을 만들 때 1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그해에 헌납‧부교리를 지냈고,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중 호당시(湖堂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숙종으로부터 상으로 표피(豹皮)를 받았다.
1690년 헌납으로 사서(司書)를 겸하였고, 이어 이조좌랑‧승지를 거쳐 1691년 경상도관찰사, 이듬해 부제학을 거쳐, 1693년 이조참의, 1694년 대사성이 되었으며,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장수(長水)에 유배되었다.
특히,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곽산의 개원사(開元寺) 불량비문(佛糧碑文)과 영변의 보현사(普賢寺) 월저대사비문(月渚大師碑文)을 찬하였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黨議通略
朝鮮金石總覽
景宗實錄
黨議通略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김갑주(金甲周)
명 : "창도(昌道)"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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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