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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석(李玄錫)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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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하서(夏瑞)
호(號)유재(游齋)
시호(諡號)문민(文敏)
생년1647(인조 25)
졸년1703(숙종 29)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상규(李尙揆)
증조부이수광(李睟光)
출생지서울
저서『명사강목』
저서『역의규반』
저서『유재집』

[상세내용]

이현석(李玄錫)
1647년(인조 25)∼1703년(숙종 2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하서(夏瑞), 호는 유재(游齋). 서울 출생. 실학자인 이수광(李睟光)의 증손으로, 이상규(李尙揆)의 아들이다.

1667년(현종 8) 진사가 되고, 1675년(숙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예문관검열에 보직된 뒤 삼사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682년 우승지가 되었으나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예론(禮論)을 반대하다가 철원에 부처되었다.

1688년 다시 동래부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경상도관찰사, 1691년 동지중추부사, 1693년 춘천부사를 지냈다.

이듬해 청풍현감을 자원하여 나가 『명사강목(明史綱目)』을 저술하였으며, 그뒤 한성부판윤우참찬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 군학(君學)과 시무(時務)에 관한 여러 소장(疏章)과 저서를 제진(製進)하였다. 탕평책과 중농정책을 건의하였으며, 경연강의(經筵講義)교재의 개편을 진언하였다. 국방정책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강화도 축성방안과 봉수제도의 개선방안 등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춘천부사 등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진휼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경제세무(經濟稅務)에 관한 실용적인 사상을 가지고 조세의 감면 등 각종 정책을 입안하였고, 역리(易理)로써 군도(君道)와 치술(治術)을 설명한 『역의규반(易義窺斑)』을 저술하여 임금에게 올렸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이론보다는 존심양성(存心養性) 등 실천적인 덕목에 치중하였다.

저서로는 『명사강목』 24권, 『역의규반』 1권, 『유재집』 24권 등이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榜目
游齋集

[집필자]

권영대(權永大)

명 : "현석(玄錫)"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艮廷記史v2聖人聽言之道惟當受而置之不必深究其意使異同之論竝容包荒之中臣等之所見如此敢啓傳曰今觀密啓允合予意大抵玄錫拈出庚午疏辭意在自解而其語意隱伏回互實多謬戾雖不罪之無足觀者此疏還出給
艮廷記史v2討有罪象以典刑唐虞盛代之所不能無則當此奸兇矯誣之後所以明倫植紀討罪懲惡之典其可以專務姑息而廢閣耶大抵玄錫因庚午之疏爲其儕流之所攻幾不能保則及今自解之言不得不如此若其支辭蔓語隱大回互雖不白直而在聖人聽言之道
寒臯觀外史v70玄錫字夏瑞號游齋全州人官三宰謚文歛
大事編年v16故一種不逞之徒以爲自上拘於時事變改外示禮待之意而禮論一款尙未釋然於聖心以此一節作爲柄以爲日後執言之地玄錫之疏亦出於探試之意也上曰玄錫乘機投疏妨賢病國之狀予已洞燭其疏雖無顯斥之言終使儒賢才入旋出其爲情狀極爲
大事編年v16事變改外示禮待之意而禮論一款尙未釋然於聖心以此一節作爲柄以爲日後執言之地玄錫之疏亦出於探試之意也上曰玄錫乘機投疏妨賢病國之狀予已洞燭其疏雖無顯斥之言終使儒賢才入旋出其爲情狀極爲凶慘臺啓非不欲允從而抑恐領府
大事編年v16大臣入對領議政金壽恒啓曰卽今諫院以玄錫遠竄之啓爭執已久時烈想以此尤爲不安而其在國家明辨處置之道恐不當置而不罪也且事有從微至著者向來凶徒以禮
國朝人物志v3學國朝榜目弟同揆逸承旨同揆子玄紀字元方號梅軒生員壯元文科大司成堂揆子玄錫字夏瑞號游齋肅宗乙卯文科吏曹判書撰明史綱目諡文敬庚申換局後南人或竄或死亦多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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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