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진주(閔鎭周)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BFCC9C4C8FCB1646X0 |
자(字) | 유문(孺文) |
시호(諡號) | 정간(貞簡) |
생년 | 1646(인조 24) |
졸년 | 1700(숙종 26)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여흥(驪興)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민시중(閔蓍重) |
[관련정보]
[상세내용]
민진주(閔鎭周)
1646년(인조 24)∼1700년(숙종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유문(孺文). 대사헌 민시중(閔蓍重)의 아들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73년(현종 14) 생원이 되고, 1684년(숙종 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병조의 좌랑,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한때 사학(四學)의 유생인 윤증(尹拯)을 비롯한 그의 일당의 미움을 사서 사퇴하였으나, 곧 병조좌랑으로 복직하여 지평으로 승진, 그뒤 사간원정언‧헌납, 이조좌랑, 교서관교리를 역임하면서 지제교(知製敎)와 중학교수(中學敎授)를 겸하였다.
1689년의 기사환국 당시 삭직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경상도관찰사‧강화유수(江華留守)‧대사간‧도승지‧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병조‧예조‧공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국방과 민정에 성의를 다하여 그 치적이 많았으나 좌의정 윤지선(尹趾善)에 의하여 면직되었다.
그뒤 복직되어 호조‧공조의 참판, 대사헌을 거쳐 1689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한성좌‧우윤(漢城左右尹), 병조참판, 부제학,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때 종제(從弟) 민진후(閔鎭厚)의 상소내용에 잘못이 있다는 소론 윤지선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여러 번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뒤 대사성‧이조참판‧동지성균관사에 임명되고 곧 병조판서‧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에 승진하였고, 대사헌‧이조판서‧상의원제조‧판의금부사가 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673년(현종 14) 생원이 되고, 1684년(숙종 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병조의 좌랑,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한때 사학(四學)의 유생인 윤증(尹拯)을 비롯한 그의 일당의 미움을 사서 사퇴하였으나, 곧 병조좌랑으로 복직하여 지평으로 승진, 그뒤 사간원정언‧헌납, 이조좌랑, 교서관교리를 역임하면서 지제교(知製敎)와 중학교수(中學敎授)를 겸하였다.
1689년의 기사환국 당시 삭직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경상도관찰사‧강화유수(江華留守)‧대사간‧도승지‧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병조‧예조‧공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국방과 민정에 성의를 다하여 그 치적이 많았으나 좌의정 윤지선(尹趾善)에 의하여 면직되었다.
그뒤 복직되어 호조‧공조의 참판, 대사헌을 거쳐 1689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한성좌‧우윤(漢城左右尹), 병조참판, 부제학,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때 종제(從弟) 민진후(閔鎭厚)의 상소내용에 잘못이 있다는 소론 윤지선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여러 번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뒤 대사성‧이조참판‧동지성균관사에 임명되고 곧 병조판서‧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에 승진하였고, 대사헌‧이조판서‧상의원제조‧판의금부사가 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承政院日記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梅山集(洪直弼)
承政院日記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梅山集(洪直弼)
[집필자]
김갑주(金甲周)
명 : "진주(鎭周)"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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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