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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손(朴泰遜)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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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길(汝吉)
호(號)천휴(天休)
생년1641(인조 19)
졸년1692(숙종 18)
시대조선중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세남(朴世楠)
조부박황(朴潢)
외조부이행진(李行進)

[상세내용]

박태손(朴泰遜)
1641년(인조 19)∼1692년(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여길(汝吉), 호는 천휴(天休).

부제학 박황(朴潢)의 손자이고, 박세남(朴世楠)의 아들이며, 모친은 예조참판 이행진(李行進)의 딸이다.

1673년(현종 14) 진사로서 반궁(泮宮)에서 시행된 제술(製述)에서 거수(居首)가 되어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할 수 있었다. 같은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도당(都堂)의 홍문록에 올랐다.

1680년(숙종 6) 영남의 염문사(廉問使)가 되었으며, 정언을 거쳐 수찬이 되었을 때 사회개혁에 대한 칠조(七條)의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부교리지평헌납이조좌랑을 거쳐 시독관(侍讀官)으로서 송시열(宋時烈)박세채(朴世采) 등 재외(在外) 제유(諸儒)들을 갱소(更召)하기를 청하였다.

이조정랑사간집의부응교응교를 거쳐, 1685년에는 승지에 특배(特拜)되었으며, 대사간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688년 대사성으로 시관(試官)이 되어 과제(課製)에 『장자』 어부편(漁父篇) 중의 말에서 글제를 내었는데, 선왕조부터 과장에서 금지되어온 노자장자의 말에서 과제를 내었다 하여 헌납 김성적(金盛迪)으로부터 추고를 당하였다.

이조참의를 거쳐 1689년 하지사(賀至使)부사(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승지로 있으면서 국왕을 보필하는 발언이 숙종을 분노하게 하여 그해에 먼 곳으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죽었다.

1694년에 승지 윤이도(尹以道)이동욱(李東郁)의 요청에 의하여 작위가 회복되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增補文獻備考
燃藜室記述
淸選考

[집필자]

주웅영(朱雄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