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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수(吳始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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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덕이(德而)
호(號)수촌(水邨)
생년1632(인조 10)
졸년1681(숙종 7)
시대조선중기
본관동복(同福)
활동분야문신 > 문신
오정원(吳挺垣)
저서『수촌집』

[상세내용]

오시수(吳始壽)
1632년(인조 10)∼1681년(숙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덕이(德而), 호는 수촌(水邨).

부친은 관찰사 오정원(吳挺垣)이다.

1648년(인조 26)에 진사가 되었고, 1656년(효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6품에 승품, 가주서(假注書)가 되었고, 정언문학지평교리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664년(현종 5)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어 평안도암행어사로 다녀왔으며, 이어 집의가 되어 낭선군(朗善君) 우(俁)의 강사영조(江舍營造)와 각 사찰에 대한 횡포를 고발하기도 하였다.

이어 응교사인을 거쳐 1666년 중시문과에 장원하였으며, 예빈시정승지를 거쳐 1670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전라도 지방의 기근의 참상을 고발하였고, 구황책으로 조적(糶糴)‧전결(田結)‧관노비‧속오군(束伍軍)의 병기‧염세목(鹽稅木)‧군사 문제 등 9개 항목을 개진하였으며, 특히 민폐가 가장 컸던 납육(臘肉: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의 진상문제를 조진하여 해결하였고, 당해연도의 신역(身役)을 절감토록 건의하였다.

그뒤 전라도 지방에 괴탄설(怪誕說)이 나돌아 추고도 당했으나 벼슬은 승지예조참의이조참의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674년 도승지가 되었다.

숙종이 즉위한 뒤 강화부유수를 거쳐 형조판서에 발탁되었으며, 1675년(숙종 1) 총융사 김만기(金萬基) 등과 북한산성의 축성을 건의하였고, 선왕 현종의 서거에 대한 청나라의 두번째 조제사(弔祭使)가 왔을 때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이들을 맞이하였으며, 이어 이조판서로 발탁되었고, 청나라 조제사들의 반송사(伴送使)가 되었다.

이어서 대사헌우참찬을 거쳐 1676년 호조판서로 발탁되어 농사의 흉황을 역설하였고, 특히 신간전자(新墾田者)는 2년에 한하여 수세치 말도록 조처하였다.

그 이듬해에 다시 대사헌판의금이조판서예조판서를 지내고, 1679년 우의정에 배수되어 말속악습(末俗惡習)인 괘서금지방안을 제시하였고, 허적(許積)과 같이 전문(錢文)의 변통사를 역설하였다.

또한 정몽주(鄭夢周)의 화상을 모시는 가묘를 짓도록 하여 봉사토록 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유배되었다가, 앞서 청나라 조제사가 왔을 때 왕에게 왕약신강설(王弱臣强說) 등 허위보고를 했다는 이유로 탄핵받고 사사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복관, 1694년 갑술옥사로 다시 관직을 추탈당했다가 1784년(정조 8)에 신원 요청으로 다시 복관되었다.

저서로는 『수촌집』이 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이미지]

[집필자]

김갑주(金甲周)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