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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첨(尙仁詹)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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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안(汝安)
생년1629(인조 7)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목천(木川)
활동분야무신
상자천(尙子賤)

[상세내용]

상인첨(尙仁詹)
1629년(인조 7)~미상.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여안(汝安)이다. 본관은 목천(木川)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이다.

부친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상자천(尙子賤)이다. 3형제 중 막내로서 형은 상명첨(尙命詹)‧상의첨(尙義詹)이다.

1651년(효종 2) 별시에서 병과 378위로 무과 급제하였다.

1680년(숙종 6)에 검토관(檢討官) 박태손(朴泰遜)이 뇌물 사건에 연루된자들에게 형벌을 내릴 것을 왕에게 주청(奏請)하면서 경신환국(庚申換局) 직후 남인이 몰락하던 시기에 정의현감(旌義縣監)으로 재임 중 백성을 탐학(貪虐)하고 관물(官物)을 빼돌려 남인이었던 윤휴(尹鑴)‧오시수(吳始壽)‧민희(閔熙) 등에게 금마(禁馬)를 보내고 아첨했다는 내용으로 권문귀족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같은 해 주강(晝講)에 참여한 검토관 이사명(李師命)이 또 다시 뇌물과 관련된 사건을 왕에게 상기시키니, 왕이 의금부(義禁府)에 국문(鞠問)할 것을 명하였다. 결국 7차례나 형신(刑訊)을 당하였으며, 특진관(特進官) 이정영(李正英)이 충분히 벌을 받았다고 상언하면서 사형을 면하였다. 1683년(숙종 9)에 왕이 특별히 풀어주도록 명하였으나,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 등이 반대하여 그대로 귀양을 살았다.

[참고문헌]


[집필자]

유치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