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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설(鄭東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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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순경(舜卿)
생년1625(인조 3)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해주(海州)
활동분야문신
정희성(鄭希聖)

[상세내용]

정동설(鄭東卨)
1625년(인조 3)~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순경(舜卿)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거주지는 경(京; 서울)이다.

증조부는 정징(鄭澄)이고, 조부는 정문형(鄭文亨)이며, 부친은 정희성(鄭希聖)이다. 외조부는 이호연(李浩然)이다.

1650년(효종 1) 증광시 진사 3등 8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봉산군수(鳳山郡守)‧낭청(郞廳)‧공조정랑(工曹正郞)‧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668년(현종 9) 봉산군수 시절, 지역민 전의명(全義明)이란 사람의 애첩인 관노(官奴)와 간통하여 질투심으로 감사에게 전의명을 무고(誣告)하여 죽게 한 일로 심문을 받았다.

1674년(현종 15) 낭청 시절 오랫동안 병환 중에 있던 현종(顯宗)이 자신의 상여(喪輿)를 수로(水路)로 옮겨오는 방법을 논의하면서 수로 가운데 큰 바위가 장애가 됨을 안타까워하자, 수심이 얕을 때를 기다려 바위를 직접 깨뜨리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해 큰 여울목의 바위를 깬 공로로 공조정랑(工曹正郞)에 제수되었다.

1680년(숙종 6) 남원부사(南原府使) 재직 당시 나쁜 행실과 지방관으로서 직무 태만을 이유로,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는 사헌부(司憲府)의 건의가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眉叟記言
顯宗實錄

[집필자]

김경희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