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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하(李端夏)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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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주(季周)
호(號)송간(松磵)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625(인조 3)
졸년1689(숙종 15)
시대조선중기
본관덕수(德水)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식(李植)
저서『외재집』

[상세내용]

이단하(李端夏)
1625년(인조 3)∼1689년(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계주(季周), 호는 외재(畏齋)송간(松磵). 판서 이식(李植)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아가 공조좌랑으로 재직중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정언부교리용안현감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북평사로 있을 때 감사 민정중(閔鼎重)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정문부(鄭文孚)의 사적(史蹟)을 조사하여 조정에 알려 관직을 추증시키고, 사당을 세워 충렬사(忠烈祠)라는 사액을 내리게 하였으며, 부교리로 있을 때에는 귀양중의 제신들을 속히 사면할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1669년 이조정랑이 되어 각사(各司) 노비의 공안(貢案)을 정리할 것을 청하여 신공(身貢)을 반 필씩 감하게 하였다. 이어 교리경서교정청(經書校正廳)교정관이 되고, 훈련별대(訓鍊別隊)의 창설을 주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그뒤 응교사간사인 등을 역임하고, 1671년 동부승지가 되고 다음해 이조참의가 되어 중종폐비 신씨(愼氏)의 신주를 신씨 본손의 집으로 옮기게 하였고, 1674년 대사성으로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어 숙종이 즉위한 뒤 서인으로서 제2차 복상문제로 숙청당한 의례제신(議禮諸臣)처벌의 부당성을 상소하다가 파직, 이듬해 삭직당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풀려나와 이듬해 홍문관제학이 되어 『현종개수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82년 대사헌으로 각릉 기신(忌辰) 제사에 유과(油果) 및 과일 위에 덮는 채색꽃을 감하여 제사비용을 줄이도록 하였고, 1684년 예조판서가 되어 「사창절목(社倉節目)」『선묘보감(宣廟寶鑑)』을 지어올렸다.

1686년 우의정이 되어 사창설치의 다섯 가지 이익을 건의하였고, 죽을 죄인에 대하여 삼복(三覆: 三審制)을 실시할 것을 청하였다.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행판돈녕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무력해진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하여 비변사의정부의 직방(直房)으로 만들고, 그 곁에 한 방(房)을 비변사로 만들어 의정부와 함께 통하게 하고, 좌우찬성의 자리를 비워두지 말고 참찬과 함께 삼공을 도와 정치를 의논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창제도를 철저히 실시하여 굶주리는 백성을 돌볼 것을 역설하였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자라나 조선 후기 경학에 있어서 대표할만한 학자이다. 용안(龍安)에 영당이 있다.

저서로는 문집인 『외재집』과 편서로 『북관지(北關誌)』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英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