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수증(金壽增)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C218C99DB1624X0
자(字)연지(延之)
호(號)곡운(谷雲)
생년1624(인조 2)
졸년1701(숙종 27)
시대조선중기
본관안동(安東[新])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부김상헌(金尙憲)
저서『곡운집』

[상세내용]

김수증(金壽增)
1624년(인조 2)∼1701년(숙종 27).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안동(安東[新]).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

조부는 김상헌(金尙憲)이다.

1650년(효종 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2년에는 세마(洗馬)가 되었다.

그뒤 형조정랑공조정랑을 거쳐 각사(各司)의 정(正)을 두루 역임하였다. 젊어서부터 산수를 좋아하여 금강산 등 여러 곳을 유람한 뒤 기행문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1670년(현종 11)에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복거(卜居)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뒤 1675년(숙종 1)에 성천부사로 있던 중, 동생 김수항(金壽恒)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이때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하여 그곳을 곡운(谷雲)이라 하고, 곡운구곡(谷雲九曲)을 경영하면서 화가인 조세걸(曺世傑)을 시켜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는 등 글씨와 그림에 관심을 기울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 등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694년 갑술옥사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좌윤공조참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한 뒤 세상을 피해 화악산(華嶽山)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이때 그는 성리학에 심취하여 북송(北宋)의 성리학자들과 주자의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소강절(邵康節)의 음양소식관(陰陽消息觀)을 정사의 조경(造景)에 응용하였다.

이와같은 사상을 도상화(圖象化)하는 데 힘을 기울여, 주돈이(周敦頤)주자의 행적에 나타나는 「태극도」‧「하도낙서(河圖洛書)」‧「선후천팔괘도(先後天八卦圖)」 등을 정사의 경내에 있는 바위에 새겨 ‘인문석(人文石)’이라 하였다.

또한, 계곡에 있는 바위들에 천근석(天根石)‧월굴암(月窟巖) 등 소강절의 사상시(思想詩)에 나오는 음양소식관을 담은 이름도 붙여 조경을 하였다. 이들의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어 성리사상이 건축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춘천춘수영당(春睡影堂)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곡운집』이 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性理大全
谷雲集
九曲圖의 發生과 機能에 對하여(兪俊英, 考古美術 151, 1981)
造形藝術과 性理學(兪俊英, 한국미술사논문집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집필자]

유준영(兪俊英)

명 : "수증(壽增)"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三官記v1李公翊相以疾卒文谷之兄谷雲翁壽增挽曰牢落乾坤後夗悲更無餘淚及親知靑山好葬如公少堪向駒原作賀辭士友傳誦莫不悲之
小華龜鑑v15疏發以濟參焉一疏卽允以濟方食却食泣曰吾爲閔道宗宗道所誤又不料一疏卽允此皆詐也啜其泣矣何嗟及矣○兄谷雲壽增字延之棲息山峽文史自娛兩弟位臺無一干請世服其高嘗曰王考奉先誠敬惟精潔床卓無金漆筵席無紋砂爐盒木燭臺今
野乘v20○金壽增以両弟之故聲譽寥寥老於塲屋而不以為嘅至顯庙朝癸丑春塘臺壽增之庶弟壽能入格而急急呼名之際壽增錯入其中渾晩所着捉至御前其弟壽興壽恒在於侍衛之列見伯氏之誤為入来蒼黃下庭曰壽能為之伯氏胡為乎来哉公無
野乘v20○金壽增以両弟之故聲譽寥寥老於塲屋而不以為嘅至顯庙朝癸丑春塘臺壽增之庶弟壽能入格而急急呼名之際壽增錯入其中渾晩所着捉至御前其弟壽興壽恒在於侍衛之列見伯氏之誤為入来蒼黃
國朝捷錄v01壽增號谷雲
國朝人物志v3雲安東人壽興弟進士蔭補洗馬官至工曹參判乙卯季弟壽恒及尤菴宋時烈皆被竄逐壽增爲成川府使投紱歸卜居春川谷雲以舊築爲不深庚午乃就其上源作不知無名等菴嗒然孤坐與
國朝人物志v3九原怊悵世間餘一老廣陵殘月又招魂辭語悲楚見者哀之己巳金壽興竄卒金壽恒受後命伯氏谷雲壽增輓李判書翊相詩曰牢落乾坤後死悲更無餘淚及親知靑山好葬如公少堪向九原作賀辭時人悲之不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