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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계(尹堦)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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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태승(泰升)
호(號)하곡(霞谷)
시호(諡號)익정(翼正)
생년1622(광해군 14)
졸년1692(숙종 18)
시대조선중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면지(尹勉之)
증조부윤두수(尹斗壽)
외조부경섬(慶暹)
저서『하곡집』

[상세내용]

윤계(尹堦)
1622년(광해군 14)∼1692년(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태승(泰升), 호는 하곡(霞谷).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증손으로, 첨정 윤면지(尹勉之)의 아들이며, 모친은 참판 경섬(慶暹)의 딸이다.

3인을 선발하기로 한 알성문과에 급제하였으나, 4등으로 급제한 김석주(金錫胄)를 참방(參榜)시키다가 말썽이 생겨, 장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방시켜 그도 떨어지게 되었으며,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665년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1669년 직강으로서 황해도도사를 겸하였다가 직무수행잘못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사서에 제수된 뒤 세자시강원문학, 지평을 역임하였고, 1617년 정언이 되어 재상의 권한 비대로 야기된 시폐(時弊)를 논하기도 하였으며, 장령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황해도관찰사로서 원접사(遠接使) 오시수(吳始壽)중국사신에게 선왕 효종이 신하의 견제를 받았다는 거짓말을 하였다 하여, 이를 극론하다가 의금부에 하옥된 뒤 영광에 유배되었다.

1680년 동부승지에 서용되었으며, 함경감사를 역임하고, 사은부사(謝恩副使)청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강화유수를 역임하였으며, 1686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강화유수 때 가렴(苛斂)하였다고 탄핵받아 부임하지 못하였다.

이듬해 한성판윤이 되고 좌참찬공조판서를 역임하고, 비변사(備邊司)의 천거로 광주유수(廣州留守)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송시열(宋時烈) 당(黨)으로 몰려 강진에 귀양 가, 1692년 적소에서 죽었다.

나라일에 대하여 직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1694년에 신원(伸寃)되었다.

저서로는 『하곡집』이 있다. 시호는 익정(翼正)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명 : "계(堦)"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震史記略v4始壽又此筵達前後辭意大抵一般往來之臣俱不聞此說而始壽一家獨能聞之人皆疑惑則欲得別人爲證始壽又上疏力卞變幻巧辭前後異說遂竄堦于鏡城○文義儒生黃錩請以時烈之罪告廟留中不下○淸州儒生柳弼明上疏論服制仍進殷周
震史記略v4子所不忍聞始壽曰譯傳如此令又聞之當面陳於復命之日及還悉奏所聞上命許積詰聞孝禮孝禮曰此乃斟酌之言事遂寢乃上疏曰通官張孝禮與臣少時同閈相親故行到平山不計私覿之嫌直入臣房略有酬酌而臣强之說初不言之矣始壽上疏
震史記略v4疏曰通官張孝禮與臣少時同閈相親故行到平山不計私覿之嫌直入臣房略有酬酌而臣强之說初不言之矣始壽上疏自卞又上疏曰臣强之說遠有源委頃年福昌君楨還自燕京以此說陳達於先朝今者始壽又此筵達前後辭意大抵一般往來之臣
震史記略v4七年辛酉賜吳始壽死乙卯始壽仍淸譯張孝禮事與尹堦互相疏卞以前後異辭遠竄至是臺諫請鞠問言根大臣請令使燕者更問孝禮孝禮答以吾但戱言朝鮮兩班鼻强未嘗有臣强等語乃拿
國朝人物志v2史局刑曹判書入耆社甲申卒年七十五以長子勉之從勳贈上相許穆撰碑人物考勉之僉正子文科判書
國朝人物志v3肅宗乙卯宗室袡內兄吳始壽爲遠接使創出北書所無之言以爲先王受制強臣可汗憐之致祭至再再上章極論始壽造言狀許積患之竄堦鏡城丙辰蒙放及庚申許堅事發堦以刑房承旨
國朝人物志v3字仲綱號龍浦海平人子乙卯進士文科官至禮曹判書授兵曹判書銓敍之際大恢公道屛請囑抑撓倖振拔淹滯隨才調用凡以功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