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규(申命圭)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2E0BA85ADDCB1618X0 |
자(字) | 군서(君瑞) |
호(號) | 묵재(黙齋) |
호(號) | 적안(適安) |
생년 | 1618(광해군 10) |
졸년 | 1688(숙종 1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평산(平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신상(申恦) |
저서 | 『묵재기문록(黙齋記聞錄)』 |
[관련정보]
[상세내용]
신명규(申命圭)
1618년(광해군 10)∼1688년(숙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원서(元瑞) 또는 신군서(申君瑞), 호는 묵재(黙齋) 또는 적안(適安). 부사 신상(申恦)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665년 지평‧장령을 지내고 이듬해인 1666년에는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바 있으며, 이어 정언‧헌납 등을 거쳐 1667년 남해로 유배되었다.
1669년 집의에 이르고, 이어 사간‧부수찬 등 주로 대간을 역임하였다.
1673년 산릉도감낭청(山陵都監郞廳)이 되어 영릉(寧陵)을 옮길 때 석역(石役)의 감독이 태만했다는 죄로 박천‧강진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1683년(숙종 9)에 풀려났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25년(영조 1) 진도 유생 박제현(朴齊賢) 등의 상소로 봉암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묵재기문록(黙齋記聞錄)』이 있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665년 지평‧장령을 지내고 이듬해인 1666년에는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바 있으며, 이어 정언‧헌납 등을 거쳐 1667년 남해로 유배되었다.
1669년 집의에 이르고, 이어 사간‧부수찬 등 주로 대간을 역임하였다.
1673년 산릉도감낭청(山陵都監郞廳)이 되어 영릉(寧陵)을 옮길 때 석역(石役)의 감독이 태만했다는 죄로 박천‧강진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1683년(숙종 9)에 풀려났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25년(영조 1) 진도 유생 박제현(朴齊賢) 등의 상소로 봉암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묵재기문록(黙齋記聞錄)』이 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肅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오갑균(吳甲均)
성명 : "신명규(申命圭)"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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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