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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尹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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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강백(剛伯)
호(號)농아(聾啞)
생년1616(광해군 8)
졸년1644(인조 22)
시대조선중기
본관남원(南原)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형갑(尹衡甲)
창원황씨(昌原黃氏)
조부윤섬(尹暹)
증조부윤우신(尹又新)
파평윤씨(坡平尹氏)
처부윤계득(尹繼得)
외조부황치경(黃致敬)
묘소김포현(金浦縣) 임촌(林村)

[상세내용]

윤유(尹柔)
1616년(광해군 8)∼1644년(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강백(剛伯), 호는 농아(聾啞).

윤우신(尹又新)의 증손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교리(校理) 윤섬(尹暹)의 손자이다. 서흥현감(瑞興縣監) 윤형갑(尹衡甲)의 아들이고, 신곡(薪谷) 윤계(尹棨)임계(林溪) 윤집(尹集)의 동생이다. 모친은 창원황씨(昌原黃氏)관찰사(觀察使) 황치경(黃致敬)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 계유증광사마시(癸酉增廣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로 벼슬할 뜻을 그만두고 자연 속에 살면서 정자(程子)주자(朱子)의 글을 강론하였다. 이 때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산속에서 그를 만났는데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맑고 깨끗한 취향을 가졌다고 술회(述懷)하였다.

1644년(인조 22) 10월 13일에 향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김포현(金浦縣) 임촌(林村)에 장사지냈고, 이후 그의 행적을 조정에 아뢰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증직되었다.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별좌(別坐) 윤계득(尹繼得)의 딸로,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윤이건(尹以健)은 1673년(현종 14) 계축식년사마시(癸丑式年司馬試)에 진사 2등으로, 차남 윤이성(尹以性)은 1666년(현종 7) 병오식년사마시(丙午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
司馬榜目

[집필자]

이미선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