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비(趙備)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870BE44FFFFB1616X0 |
자(字) | 사구(士求) |
호(號) | 총계와(叢桂窩) |
생년 | 1616(광해군 8) |
졸년 | 1659(효종 10)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한양(漢陽)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찬한(趙纘韓) |
[관련정보]
[상세내용]
조비(趙備)
1616년(광해군 8)∼1659년(효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구(士求), 호는 총계와(叢桂窩). 좌승지 조찬한(趙纘韓)의 아들이며, 이식(李植)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1635년(인조 1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병자호란으로 영남으로 갔다가 전라도 장성으로 피란하였다. 몇 해 뒤에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어머니의 권유로 사옹원참봉으로 취임하여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위수(衛率)를 역임하고 청하현감이 되었다.
1651년(효종 2)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겸춘추관이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어 사서‧정언 겸 지제교 등을 역임하고 교리에 이르렀다. 뒤에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임실현감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병조정랑‧성균관사예‧제용감정 겸 서학교수(濟用監正兼西學敎授)를 지냈다.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언변과 문장에도 뛰어났다. 사어(射御)‧도화(圖畵) 등에도 정통하였고, 특히 사부(詞賦)와 변려문(騈儷文)으로 이름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글씨도 잘써 전서(篆書)‧주서(籒書)에 능하였다.
말년에는 시문을 더욱 즐겼으며 유집(遺集)12권이 있다.
1635년(인조 1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병자호란으로 영남으로 갔다가 전라도 장성으로 피란하였다. 몇 해 뒤에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어머니의 권유로 사옹원참봉으로 취임하여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위수(衛率)를 역임하고 청하현감이 되었다.
1651년(효종 2)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겸춘추관이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어 사서‧정언 겸 지제교 등을 역임하고 교리에 이르렀다. 뒤에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임실현감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병조정랑‧성균관사예‧제용감정 겸 서학교수(濟用監正兼西學敎授)를 지냈다.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언변과 문장에도 뛰어났다. 사어(射御)‧도화(圖畵) 등에도 정통하였고, 특히 사부(詞賦)와 변려문(騈儷文)으로 이름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글씨도 잘써 전서(篆書)‧주서(籒書)에 능하였다.
말년에는 시문을 더욱 즐겼으며 유집(遺集)12권이 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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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