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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흠(金堯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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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흠지(欽之)
호(號)괴암(乖菴)
생년1614(광해군 6)
졸년1656(효종 7)
시대조선중기
본관함창(咸昌)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김요흠(金堯欽)
1614년(광해군 6)∼1656년(효종 7).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흠지(欽之)이고, 호는 괴암(乖菴)이다. 본관은 함창(咸昌)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이다.

증조부는 김응린(金應麟)이고, 조부는 김도(金陶)이다. 부친 김우추(金遇秋)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김요로(金堯老)가 있다.

1642년(인조 20) 식년시 생원 3등 33위로 합격하였고, 1649년(인조 27) 별시 병과 1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와 저작(著作) 겸 봉상시직장(兼奉常寺直長)을 지냈으며, 1650년(효종 1) 선릉전시관(宣陵奠祀官)에 제수되고, 1651년(효종 2) 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정랑(正郞) 겸 춘추관기주관(兼春秋館記注官)에, 1653년(효종 4)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에 제수되었다. 한양 삼청동(三淸洞)에서 신진 유학 26인과 도회를 조직하여 두건과 옷을 갖추어 연회하고 질주하는 모습의 ‘영남도회계첩도(嶺南道會契帖圖)’를 만들었다.

당쟁이 심해진 뒤에는 신천(新川)으로 돌아와 사례촌사(沙禮村舍)에서 후진을 가르쳤다. 1655년(효종 6) 심한 가뭄에 순찰사에게 구휼을 청하는 정문을 올렸으며, 풍속을 돈독히 하기 위하여 동계(洞契)를 만들어 입안(立案)하였다.

유고로 『괴암집(乖庵集)』이 전한다.

[참고문헌]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