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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달제(吳達濟)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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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휘(季輝)
호(號)추담(秋潭)
시호(諡號)충렬(忠烈)
생년1609(광해군 1)
졸년1637(인조 15)
시대조선중기
본관해주(海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오윤해(吳允諧)
저서『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

[상세내용]

오달제(吳達濟)
1609년(광해군 1)∼1637년(인조 15).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오윤해(吳允諧)의 아들이다.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4년(인조 12) 26세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적병조좌랑시강원사서정언지평수찬을 거쳐, 1636년에 부교리가 되었다.

이때 후금의 세력이 날로 커져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을 무섭게 위협하여왔다.

이에 화친을 위하여 주화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임금을 속이고 삼사(三司)의 공의(公議)를 위협, 제지하여 임의로 사신을 보낸 최명길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게 되자, 청나라측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윤집(尹集)과 더불어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서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협박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였다.

그는 마침내 심양성(瀋陽城) 서문 밖에서 윤집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그는 묵매화(墨梅畵)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魚夢龍)조속(趙涑)허목(許穆)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의 묵매화풍을 영향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

그의 그림은 『묵매도(墨梅圖)』 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뒤의 조지운(趙之耘)홍수주(洪受疇)박동진(朴東晉)조희룡(趙熙龍)이공우(李公愚) 등의 묵매화에 영향을 주었다. 좌승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절현사(節顯祠), 평택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丙子錄(羅爲甲)
韓國儒學史(李丙燾, 亞細亞文化社, 1987)

[집필자]

박용옥(朴容玉)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