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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홍리(徐弘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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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중(汝重)
생년1607(선조 40)
졸년1687(숙종 13)
시대조선중기
본관대구(大丘)
활동분야무신 > 무신

[상세내용]

서홍리(徐弘履)
1607년(선조 40)∼1687년(숙종 13).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여중(汝重)이다. 본관은 대구(大丘)이고, 출신지는 서울이다.

조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증영의정(贈領議政) 충숙공(忠肅公) 서성(徐渻)이고, 부친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籖) 서경수(徐景需)와 모친 충의위(忠義衛) 김희(金僖)의 딸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감찰(監察) 김수선(金綏善)의 딸 정부인(貞夫人)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8살 때 모친을 여의었으며 어려서부터 조부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1630년(인조 8) 식년시 진사과 3등 56위로 합격하였다. 다음 해부터 도봉유원(道峰儒院)에서 공부하며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등과 교유하였다.

이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3년 뒤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로 승차되었다. 당시 군기시제조(提調)였던 완풍군(完豊君) 이서(李曙)의 총애를 받아 병기를 만드는 일 외에도 군기시의 여러 일들을 도맡아 보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637년(인조 15) 환도 한 뒤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었으며, 1639년(인조 17) 다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1643년(인조 21)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644년(인조 22) 호조좌랑(戶曹佐郞)‧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등을 지냈다. 그 뒤 외직으로 1669년(현종 10) 온양군수(溫陽郡守)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6년간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곳곳에 송덕비를 새겨 그 공덕을 칭송하였다.

1659년(효종 10) 잠깐 호조(戶曹)로 복귀하기도 하였으나, 다음 해 다시 한산군수(韓山郡守)로 나가 만년에는 서산군수(瑞山郡守)‧남양현감(南陽縣監) 등 주로 외직에 있었다. 한산군수 시절에는 진휼을 잘했다는 어사(御使) 여성제(呂聖齊)의 서계(書啓)로 상을 받기도 하였으나 2년 뒤, 면강첩(免講帖)으로 재물을 취하여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는 탄핵을 받았다.

1686년(숙종 12) 80살 때 종2품에 오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슬하에 5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서문준(徐文濬)‧서문해(徐文海)‧서문한(徐文漢)‧서문숙(徐文淑)‧서문연(徐文演)이다.

[참고문헌]

晩靜堂集

[집필자]

고윤수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1-04사마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